[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나보고 한국 영화 중에서 어떤 영화를 최고로 치냐고 물어보면 요절한 천재 감독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과 과작(寡作)의 명감독 정지영의 ‘하얀 전쟁’을 꼽는다. 물론 최근의 ‘괴물’도 좋고 류승완 감독의 ‘짝패’도 좋고, 희대의 스타일리스트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참 그 분의 다른 영화와 달리 무척 재미있게 보았다. 허나 단연코 위의 두 영화가 압권이다. 내게는 그것이 배우 김희라의 아버지 김승호가 우리나라 제일의 배우라고 믿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요컨대 ‘전무’는 모르겠으나 내 생각에 분명히 ‘후무’하다.

그리고 또 한 영화가 있다. 허준호, 김민종, 박광정 등등 기라성같은 배우들이 주연한 ‘마지막 방위’가 그것인데 아마 흥행하지 못했을 것이며 작품성 자체를 평가 받지도 못했던 걸로 기억된다. 대부분의 최근 영화들이 그렇듯이 일단 말도 안 되는 영화니까.. 허나 그 ‘마지막 방위’를 나는 무지 좋아한다. 자 이제부터 ‘영화 대 영화’다.

월남전에 참전하여 수십 명 전우의 죽음을 목격하고 살아남은 한기주(안성기)는 어느 날 갑자기, 역시 같이 참전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변진수(이경영)의 전화를 받는다. 이미 이 전제에서 보여지듯 그들은 죄의식, 혹은 악몽, 혹은 결코 해소되지 않을법한 ‘한’으로 그들의 배후를 조성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당연히 무겁게 흘러가고 그 무거움은 전율이 일 듯한 리얼리즘으로 세심하게 조각된다. 참 좋은 영화다. 더욱이 주인공인 안성기는 바로 그 끔찍했던 월남전을 소설로 연재하여 밥을 먹고 사는 입장이어서 아마도 자신이 겪었던 처절함과 본능적 욕구를 희화해야하는 아픔도 같이 가지고 있을 법 하다. 그리고 이명과 환각에 시달리던 변진수는 제발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한기주에게 부탁하고 한기주는 그런 변진수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댄다. 참 오싹한 결자해지요 너무도 비극적인 연속성이다. 최고의 영화다.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 갇혀 있는 한국인 인질들을 구하기 위해 방위병들이 투하된다. 어떤 할일 없는 해커의 장난으로 5명의 특공대가 5명의 방위로 대치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나로 하여금 그 영화를 좋아하게 한 장면이 펼쳐진다. 어설프게 정글 숲을 정찰하며 지나가던 허준호와 이형철의 대화.

“야. 간디 너는 뭣땀시 방위로 오게 됐냐?”

“어렸을 때 개한테 물려서 X알 한쪽이 없어요”

“워미.... 짠한거....”

짠하단다. 보고 있는 관객들은 배를 잡고 웃고 있는데 허준호는 이형철이 불쌍해 보인 것이다. 안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장면에서 비할 바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그것은 정말이지 동지애요 사랑이다. 비디오를 꺼버릴까 하다가 바로 그 장면에 반해 끝까지 봤던 기억이 난다.

최근에는 ‘하얀 전쟁’같은 영화를 구경할 수 없다. 그런 무거운 영화에 돈을 대겠다는 제작자도 없겠지만 그런 골치 아픈 영화를 보겠다는 관객도 없을 터이니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예전보다 훨씬 무식해진 게 분명하다. 골치 아픈 것은 안 보려 하니까) 하긴 TV만 틀면 ‘무한하게 도전’하고 ‘대한민국을 웃겨드리겠다’고 하고 ‘놀러’오라고 손짓하는 마당에 누가 굳이 돈까지 내 가면서 골치를 싸매겠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언감생심 ‘하얀 전쟁’ 같은 영화를 구경할 수 없게 됐다. 그런 영화들은 멸종했다. 언젠가 학생들을 가르칠 일이 있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희생’을 틀어줬다가 다들 조는 통에 곤욕을 치렀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 영화는 아주 무거운 철학적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나는 그 때 까지만 해도 우리 백성들이 그렇게 까지 ‘무거운’ 것을 싫어하는지 몰랐다.)

‘마지막 방위’ 같은 영화라도 좀 나왔으면 좋겠다.
참으로 어설프고 때론 억지스럽지만 거기에 ‘인간’이 있는 그런 영화 말이다. ‘X알을 개에게 물린’ 상황은 물론 웃기는 상황이지만 한편으로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인가. 그런 상황을 보여주고 거기서 진정 ‘짠함’을 느끼게 하는 영화가 나왔으면 참 좋겠다.

/변영국 200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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