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에 읽는 사회교리]

모든 것이 낯선 이 시기가 이렇게 오래 지속될 줄 몰랐다. 지난 2월 말 나는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2월 15일 출국할 때만 해도, 확진자 수는 서른 명에 미치지 못했다. 부모님은 걱정하셨지만 심각한 상황으로 보이진 않았고, 목적지였던 야마구치현에는 아직 단 한 명의 확진자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일주일 사이 상황은 급변했다. 2월 20일 한국 내 확진자가 100명을 돌파했고, 대구대교구에 속한 부모님은 공동체 미사가 중단됐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나는 무사히 서울로 돌아왔지만, 그때만 해도 우리 앞에 닥친 봄이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나는 해외 출장이 많은 편이다. 아니, 편이었다. 회의나 포럼 참가, 평화·탈핵·이주를 주제로 한 다양한 연대 활동, 현장 취재와 인터뷰 등을 위해 자주 외국을 오갔다. 특히 지난 2년은 2달에 1번꼴로 해외 출장이 있었다. 한국에서 호스트로 혹은 참가자로 외국에서 오는 동료들을 맞이하는 일까지 포함하면 거의 매달 소위 ‘국제행사’가 있었던 셈이다. 올봄도 계획은 다르지 않았다. 3월에는 예수회 아시아·태평양 지역구 이주 네트워크 회의가 계획되어 있었고, 다음 주에는 동북아시아 그리스도인 화해포럼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다음 달에는 의정부교구 청년연구자모임 샬롬회 일원으로 한일 관계의 새로운 모색을 위해 일본에서 오는 청년들을 맞이할 계획이었다.

예상했겠지만 이 모든 일정은 취소되었다. 4월 이후 한국의 상황은 차차 안정되었지만, 여전히 사회적 거리 두기는 계속되었고 국경을 넘는 일은 특히 요원해 보인다. “만날 수 없어, 만나고 싶은데” 하고 노래를 부르지만, 여전히 매일 확진자가 생기고 의료진은 사투를 벌이는 이 시점에 우리가 준비하던 만남은 어떤 의미 또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지 성찰하게 되기도 한다. 국경을 넘고, 국경을 넘어 찾아오는 동료를 맞이하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었던 시기로부터 3개월여가 흐르자 모두가 새로운 일상에 차차 익숙해졌다. 서툴기만 했던 화상회의에 다들 적응했고, 상황을 지켜보며 일단 연기하기로 했던 행사는 취소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공항. (이미지 출처 = Pixabay)

국경을 넘은 ‘연대’는 내 일상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는 일이다. 국제적 연대가 필요한 이주, 평화, 환경 문제를 두고 서로의 경험과 영감을 나누고,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은 물론 그 자체로 의미 있다. 그에 더해 개인적으로는 여러 나라 동료들과 주고받는 우정과 지지가 구체적인 변화를 매일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쉽게 지치기 쉬운 활동을 계속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여행을 싫어하는 집순이가 새로운 곳을 경험하고, 새로운 동료들을 만나고, 여러 번 오고 가며 그들과 친구가 되는 체험을 하는 특별한 기회이기도 했다.

그리고 코로나19 이후, 지난 몇 달간 겪어야 했던 새로운 상황은 우리가 이어온 ‘연대’의 방식을 고민하게 한다. 직접 만나고 함께 현장을 찾는 지금까지의 방식은 지속하기 어렵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발 빠른 IT 기업들의 행보는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을 현실로 바꿔 나가는 중이다. 트위터는 5월 12일 “직원들이 원하는 경우 ‘영구적으로’ 재택근무를 할 수 있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페이스북 또한 21일 “재택근무를 중심으로 회사 운영 방식을 영구적으로 재조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페이스북은 이를 통해 10년 내에 직원의 절반이 재택근무를 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손꼽아 기다리던 제35차 세계청년대회도 연기됐다. 2022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안전을 고려해 2023년으로 연기된 것이다. 물론 이 결정은 세계성체대회, 세계가정대회가 순차적으로 연기되며 세계청년대회 역시 1년 뒤로 미뤄진 것이긴 하지만 2022년 행사까지 연기되는 상황은 생경했다. 그러나 조심스럽지만 우울한 전망은 어쩌면 우리는 2023년에도 리스본에 모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몇백만 명이 한곳에 모여 만나고, 부대끼는 국제행사는 지난 겨울이 마지막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그때 우리는 그것이 마지막임을 알지 못했지만.

'진리 안의 사랑' (표지 출처 =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홈페이지)

2009년 반포된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회칙 ‘진리 안의 사랑’은 교황 바오로 6세가 1967년 발표한 회칙 ‘민족들의 발전’이 제시한 온전한 인간 발전에 관한 가르침에 따라 세계화가 가속되는 오늘날 세상을 반추한다. 특히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우리는 최근 수십 년간 적용된 발전 모델들이 바오로 6세의 기대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 주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21항)라고 지적한다. 지난 40여 년간 세계적 부는 절대 수치에서 증가했지만, 불평등 또한 증가했으며 지구 자원의 무절제한 착취, 경제 금융 위기는 더욱 첨예하고 시급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진리 안의 사랑’은 세계화의 현실을 들여다보며 세계화 과정 아래에서, 인류는 점점 더 서로 연결되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세계화는 빈곤과 불평등을 증대시키며 심지어 전 세계적 위기를 촉발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베네딕토 16세는 이 회칙을 통해 세계화가 촉발한 다양한 문제들을 분석하지만 동시에 “세계화는 선험적으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그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을 인용한다.

‘진리 안의 사랑’이 제시하는 세계화 시대를 좋은 것으로 살아내는 방안은 ‘사고의 쇄신’이다. “민족들의 발전은 무엇보다도 인류는 단지 어쩌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라 참된 친교 안에서 협력하는 한 가족임을 인식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세상 민족들 간의 상호 교류는 소외가 아니라 연대를 의미하는 통합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사고의 쇄신을 촉구합니다.”(53항) 더불어 결론에 이르러서는 “바오로 6세께서는 ‘민족들의 발전’에서 인간은 혼자 힘으로는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혼자서는 진정한 인도주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78항)라고 말하며, 인류 공동체의 국경을 넘은 연대를 강조한다.

‘진리 안의 사랑’ 반포로부터 다시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세계화가 불러온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마주했다. 오직 개발과 발전의 논리로 파괴해 온 생태계는 신종 전염병을 발생시켰고, 고작 한두 달 만에 병은 전 세계로 퍼져 수많은 생명을 빼앗았다. 전염병이 일으킨 경제위기의 여파에서 자유로운 국가는 어느 곳도 없다. 언제든 드나들 수 있었던 국경의 문은 너무나 쉽게 닫히고, 인종과 국가 개념에 기초한 배제와 혐오가 곳곳에서 되살아났다. 상황은 어쩌면 10년 전보다 더 나쁘다. 세상 민족 모두가 친교 안에 협력하는 연대가 이런 시대에 어떻게 가능하냐고 되묻고 싶어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도 모든 행사와 출장이 취소되면서 어렵게 이어오던 교류와 연대가 이대로 단절되는 것은 아닌가 두려움에 시달렸다.

연대. (이미지 출처 = Pixabay)

국제 연대라는 업무의 중요한 부분이 일시 정지되면서 내가 일하는 센터도 다소 여유가 생겼다. 잠깐의 여유는 쉼이 되지만,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조바심도 커졌다. 그러나 실마리는 우연히 얻었다. 평소 즐겨보던 예능프로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를 보던 중이었다. 본래는 한국에 처음 오는 외국인들의 한국 여행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지만,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며 프로그램은 방향을 완전히 전환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 곧 이주민들의 한국살이를 조명하는 에피소드를 방영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국제회의에 참석해 이주나 화해의 문제를 나누는 것만이 연대를 실천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한국에는 이미 수많은 이주민이 살고 있다. 바로 지금이 우리 사회 안의 이민자들과 더욱 적극적으로 연대하고, 특히 코로나19 로 인해 이주민들이 겪고 있는 특별한 어려움에 함께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진리 안의 사랑’ 역시 주목할 만한 온전한 인간 발전의 또 다른 측면으로 ‘이민 현상’을 언급하며, “모든 이민은 어떤 상황에서든 누구에게나 존중받아야 할 양도할 수 없는 기본권을 가진 인간”(62항)임을 명시한다. “세계화는 선험적으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그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말이 내내 머릿속에 맴돈다. 코로나19가 가져온 대재앙도, 국경 폐쇄와 인종차별과 혐오도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며 이를 극복하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사태가 장기화하고 어쩌면 영구화되며 IT 기업들이 업무 형태를 전환하듯, 국제 연대 역시 새로운 모델을 고민하는 시점에 도달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만큼 발 빠르게 대안을 찾기는 어렵지만, 우리들 역시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교류하고 연대하며 협력하는 방안을 찾아 나갈 것이다.

각자 다른 맥락 안에 속해 있지만 그래서 더 절대적인 지지와 응원을 보낼 수 있었던 동료들과의 만남, 오랜만에 모여 일정 끝에 한잔하던 꿀 같은 저녁은 역시 아쉽다. 출장 전날 밤이면 짐을 싸며 “떠돌이 인생”이라 자조했지만, 새로운 곳에 도착하면 매번 “역시 오길 잘했다” 느끼던 시간이 벌써 그립다. 내게는 큰 에너지가 되던 시간이기에 더 그렇다. 뉴노멀 시대, 나는 어디서 새로운 에너지를 길러낼 수 있을까? 나의 질문에 ‘진리 안의 사랑’은 이렇게 답한다.

“우리가 개인으로든 공동체로든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가족에 속하도록 부름받았다는 것을 인식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참되고 완전한 인도주의에 이바지할 새로운 전망을 낳을 수 있고 새로운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유한하고 덧없는 것을 뛰어넘도록 촉구하고, 끊임없이 모든 이의 유익을 추구하며 일할 용기를 줍니다.”(78항)

정다빈(멜라니아)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연구원. 
대학에서는 예술경영과 영상이론을, 대학원에서는 법을 공부했다.
인간 존엄성이 어떠한 논리로도 훼손되지 않는 세상, 모든 인간의 다름이 그대로 인정받는 공동체 그리고 서로를 향한 존중 위에 싹트는 평화를 위해 오늘도 일하고 읽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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