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규, 분도, 50

형을 알게 된 것은 또 어떤 인연일까? 김해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수업시간에 요긴하게 쓸만한 자료를 좀 모와보자고 만들게 된 것이 ‘인디고 유니콘’이라는 인터넷 카페였고, 그 자료를 모으느라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어둠속에 갇힌 불꽃’이라는 카페에 접속이 되었다. 거기에 흔적을 남겼더니, 마침 그곳 지기였던 형이 먼저 알아보고 누구 아니냐고 물어왔다. 아, 사람은 그렇게도 인연이 지어지는 모양이다. 내가 서울에 올라오게 되면서, 당시 천안에 있던 형과 더 밀접하게 소통을 하게 되었다. 가톨릭인터넷언론을 하면서는 형을 편집위원으로 초대하였다. 애초에 카페에서 시작해서 홈페이지로 언론을 키워가자는 발상을 가졌기 때문에, 그 분야에 한 소식을 갖고 있는 형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사람이란 하나의 고유한 깃발을 들고 있으면, 그 빛깔에 맞는 사람들이 서로 갈망하고 이름을 부르게 되는 모양이다. 그야말로 그렇게 형과 ‘접속’되었다. 영혼의 빛깔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서로의 삶에 큰 힘이 되어주는 법이다. 영적 관심과 문화적 코드가 어쩜 이렇게 잘 맞아 돌아갈 수 있을까, 놀라운 경험을 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그 사람도 좋아한다는 것, 내가 연모하는 사람을 그 사람도 연모하고 있었다는 것, 내가 갈망하던 것을 그 이도 더불어 갈망해 왔다는 것, 그런 것들을 보이지 않는 조화라 해야 할까? 늘 낮은 곳으로 가려하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 법인데, 때로는 그들이 먼저 내게로 온다. 그래서 오히려 나를 안아주고 가슴 열어 품어낸다. 그 형이 자주 항상 이따금 했던 말이 ‘관용’이었다.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다보면, 온라인상에서 의견이 달라 서로 윽박지르고 다투는 경우도 많이 보는데, ‘어둠속에 갇힌 불꽃’에서는 이 모든 실랑이를 다 허용한다. 당신이 이곳저곳에서 글을 옮겨 오듯이, 불꽃의 모든 꼭지들은 스크랩 금지가 없다. 물처럼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머물다 또 그렇게 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내버려 둔다. 제 의식의 깊이만큼 느끼고, 깜냥껏 즐기고 얻어가는 것이다. 그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 모든 미덕은 그저 순탄하게 얻어진 지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이 쉰에 사람을 그리워 한다는 것

형은 서울에 오면 늘 내게 전화를 걸곤 했다. 이름을 부르고 만나고 싶은 것이다. 이제 쉰을 갓 넘긴 형이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어느 날은 연구소에 마련된 내 숙소에서 한나절 동안 일기장을 열어놓듯이 이야기를 하고 간 적도 있다. 소아마비로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형은 그러나, 누구보다 밝고 따뜻하다. 그리고 지금은 수도원에 들어가 청원기를 보내고 있다. 그 형을 지난 주말에 경기도 이천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천주성삼수도원’이다. 먼저 대전에 들러 격주간으로 대전역 광장에서 노숙인들에게 무료급식 활동을 하는 ‘둘이나셋’ 공동체 사람들을 만나고 가는 길이다. 세종이가 분투하고 있는 둘이나셋 식구들은 요즘 동네에 ‘어린이도서관’을 만드느라 바쁘다. 낡고 작은 건물 한 층을 빌려 리모델링을 하고, 책장이 들어오고, 바닥엔 아직 책들이 그득 쌓여서 정리가 덜 된 상태였다. 지연씨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런 좋은 인연들을 만나고 뒤이어 중규형을 만나기 위해 저녁무렵에 이천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린 것이다. 형은 수족처럼 타고 다니던 승용차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이 그렇게 애인처럼 끼고 살던 컴퓨터와 휴대폰도 없이 사는 수도생활이 견딜만 한지 걱정되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전하는 소식

형은 내가 형 이야기를 들으러 온다는 전갈을 듣고 미리 성찰적 메모를 적어두었던 모양이다. 형이 먼저 나를 데리고 간곳은 여주 고속도로휴게소였다. 왕복 1,400원의 고속도로 통행료를 내면 들락거릴 수 휴게소에는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들고 우린 형이 작성한 원고를 거기서 프린트하였다.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곳이 내겐 사막이요 광야 아란야만 같다. 수도원 들어와서 인터넷과 휴대폰을 끊고 보니 세속과의 단절을 일단 실감하게 된다. 벌써 수도원에 온지 새해를 맞고도 몇 달을 넘어섰다. 지난 50년을 대도시에서만 생활하다 불현듯 시골농장에 와 살게 되니 낯설기만 했지만 감사하게도 생활에 적응이 잘 되었다. 어쩌면 오랜 갈망에 대한 열림이라서 그럴까. 몇 달을 살면서도 마음이 참 편안하기만 하다. 새벽미사, 성무일도, 영적독서, 식사준비 등등... 전례중심으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과 속에서 ‘지금 바로 여기’를 충만히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실감한다. 이런 삶이 내 인생에 양적 변화를 가져다주진 않겠지만 혹시라도 질적 변형을 가져다주진 않을까 여겨지며, 그것이 다름 아닌 구원의 여정이라고 믿고 싶어진다.”

중규형이 수도회에 입회하게 된 것은, 그것도 쉰 살이 다 되어 그리 한 것은 어느 날 불쑥 저지른 사건이 아니다. 그에게 성소란 항상 ‘쟁취해야 할’ 어떤 것이었다. 하반신 마비 장애인을 어느 수도회에서 반길 것이며, 어느 교구에서 신학생으로 받아줄 것인가?

중규형은 이른바 오팔년 개띠로 가톨릭 집안의 3남7녀 중 일곱 번째 장남으로 태어나 첫돌 때 소아마비로 장애를 입게 되어 한 평생 휠체어 생활을 하게 되었다. 대가족 속에서 자라나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장애 때문에 비록 정규수업은 초등학교 1학년과 6학년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등 3년간뿐이었지만 많은 형제들 속에서 배움을 스스로 익히고, 특히 독서와 문학 그리고 글쓰기를 즐겼다. 이게 바탕이 되어 이십대 초반에 늦게나마 중고등검정고시를 통과하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어둠을 사르고 다시 돋아나는 불꽃

그가 성찰적 메모에서 말하고 있듯이, 형은 ‘어둠 속에 갇힌 불꽃’이었다. 첫돌도 안 되어 소아마비로 아픔의 굴레가 덮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온갖 어둠의 힘들이 형의 영혼 안에 깃든 불꽃을 잠재우려 하였다. 형이 7번씩이나 자살을 기도했다는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어떤 다른 힘이 다가와 생명의 의지를 북돋아 주어, 이 어둠을 견디어내게 해 주었다. 형은 마음 한 편에선 당신의 불꽃을 가두며 아예 꺼 버리려 하는데, 다른 한 기운이 기름까지 부으며 불꽃이 활활 타오를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고백했다. 이젠 오히려 형의 영적 갈망이 불꽃이 되어 그 어둠을 불살라 먹고 활활 타오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형은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이내 부친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서울로 부산으로 전전하면서 골방에 틀어박혀 지내야 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했다. 모두가 온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물원 원숭이처럼 보이는 것도 싫었다. 마치 카프카의 소설에 나오는 그레고리 잠처럼 자신이 벌레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이 시절은 형이 삶의 바닥에서 견디고 있었던 ‘어둔밤’이었다. 억울하다는 말이 그런 뜻일까? 형은 억억, 소리도 내지 못하면서 운다는 말이 뭔지 그때 알았다고 한다. 그는 내내 “사람들 만나도 떨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하느님께 빌었다.


이젠 세상을 만나러 가자, 장애인 형제들과 함께

그러나 그를 사람들과 접촉하도록 만든 것은 스무살 무렵부터 시작한 건재상 일 때문이었다. 그는 건재상에 딸린 방에 살면서 일을 하였는데, 돈 버는 재미도 있었고, 상점을 찾아오는 노가다 하는 사람들 속에서 인간미도 느꼈다고 한다. 건자재와 망치며 못을 사러 오는 사람들, 허름한 그들에게선 편견없는 편안함이 묻어 나왔을 것이다. 그 사람들을 허물없이 만나게 되면서 대인기피증이 사라져 갔다.

그러다 ‘치유은사’를 베푼다는 성령세미나에 쫓아다니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형은 다른 장애인들을 만나 “나같은 사람이 나만이 아니다.”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택시 한번 타려면 가족들이 길에 나와서 택시를 부르는 동안 골목에 숨어 있어야 했던 날이 많았다. 골목에서 나오는 순간 그냥 달아나는 택시기사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일찍 운전을 배워 다른 장애인들 차량봉사 하느라 부산시내 산지사방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형은 장애인복지에 눈을 뜨게 되었다. 부산교구 산하에 ‘부산가톨릭지체장애인복지회’를 만들기도 하고, 장애아동 교육기관인 ‘마리아특수아동조기교육원’을 직접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 시절엔 장애인들 중에 굶어죽는 사람도 많았고 욕창이 나서 구더기가 끓고 자식들에게 버림받은 이들도 많았다. 참으로 참담하기만 하였던 장애인 현실을 보면서 남은 생을 장애인들을 위해 살겠노라 하느님께 다짐을 두기도 하였다. 형은 장애인 복지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게 사회구조의 문제라는 걸 깨닫고 ‘부산 민주화추진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하고, 시국미사와 김동길, 한완상 선생 강연회 등을 쫓아다니기도 하였다. 최근엔 민주노동당 일도 보았던 형이다.

부르심에 응답하려는 투쟁

형은 열 살 때 첫영성체를 영해 주던 외삼촌이었던 신상조 신부의 모습을 보고 사제가 되고자 갈망했다. 외삼촌은 광주가톨릭신학대학의 교수로 계셨는데, 어린 형에게 <전망>지 등 신학책을 건네주곤 하였고, 거동이 불편한 형은 버릇처럼 책에 몰두하였다. 그때 네메세끼, 십자가의 성 요한, 떼야르 드 샤르댕, 서인석 신부 등을 책으로 만났다. 그리고 ‘오순절 평화의 마을’의 오수영 신부는 장애인수도회를 그에게 만들자고 했고, ‘작은 예수회’의 박성구 신부는 장애인 사제가 필요하다고 하였지만, 결국 진척이 되지 않아 성소를 이루지 못했다. 부산교구 신학생이 될뻔 한 적도 있었지만 제도교회의 편견에 부딪쳐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형이 성소에 뜻을 품고 신학교를 찾아다니자 어느 신부는 “하느님께 바치는 양은 흠이 없어야 한다.”는 싫은 소리까지 하였다. 이런 기막힌 소리를 들으며 교회에 대한 쇄신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4년 전 어머니께서 하늘나라로 가시고, 이젠 어쩔 수 없이 세상 속에 살면서 장애인들을 위해 남은 생을 바치자 생각하고서 천안 나사렛대학교 재활복지대학원에 만학도로 입학하여 주경야독이란 말대로 학업과 교내 복지사업을 함께하면서 지난 해 대학원을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 후 여러 가지 전문자격요건을 갖추게 되면서 장애인들의 온전한 자립생활을 도모하는 ‘다함장애인자립(IL)생활센터’ 소장을 맡는 등 대학교와 천안 지역의 장애인 단체에서 일했다 형은 장애인들을 위해 일하는 게 자신의 성소라 여기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 그러다 지난해에 수도회로부터 입회 권유를 받고 내심 반가움과 함께 당황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상처의 깊이만큼 간절히 손을 내민다

중규형은 이제 나이 50이 되어 부르심을 받아 순종하는 마음으로 수도원에 마음을 붙이고 있다. 어리석은 바보처럼 모든 것을 다 팔아 밭을 산 사람처럼, 그저 묵묵히 하느님 그분의 손길에 자신을 맡기기로 하였다. 형이 갈망하는 하느님, 평생 떼어낼 수 없도록 단단히 붙잡아 두시는 그분은 형에게 무슨 의미일까? 형의 메모를 잠깐 다시 보자.

“하느님은 때때로 나의 가슴에다 의도적으로 상처를 내신다. 그 갈라진 상처의 깊이만큼 나는 아픔에 신음하며 괴로워하며 그분께 간절히 손을 내민다. 그리하여 그 상처의 순간으로 인해 나의 신앙은 새롭게 거듭난다. 그것은 마치 어릴 때 내가 체하여 멍할 때마다 콧힘 넣은 바늘로 내 엄지손가락을 일부러 찔러 따 핏방울을 내어 피돌림을 원활하게 하여 막힘을 뚫어내곤 하시던 어른들의 그 치료방법과 흡사하다. 신비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그 갈라진 상처를 움켜쥐고서 신음할 때 그분은 내게 더할 바 없이 깊숙이 간절하게 다가 와서 날 위로하며 껴안으신다. 비록 상처는 온전히 치유되지 않았지만, 내 상처의 터를 당신 사랑의 꽃밭으로 순간순간 만들어 주신다. 그렇다. 진정 그분은 내 인생에 있어 늘상 어둠 속을 밝혀주시는 등불이셨다. 지나간 인생의 곳곳에서 내 마음 속에서 가끔씩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올랐던 그 순간까지 나를 지켜준 것은 내 마음 속에서 사그라들지 않고 늘 조용하게 타올랐던 그분의 등불 같은 그 마음이었다. 진정 그러하기에 그분은 늘 쓰러지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다.”


내가 이천으로 형을 만나러 간 그날, 우린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들 다 자는 밤중에 일어나 앉아 사실상 끝이 없을지도 모르는 생을 입담으로 나누었다. 세상에서 그가 겪은 많은 일들이 형에게 아픈 사람들에게로, 더 바닥에서 절망한 이들에게로 건너갈 수 있는 자산이 될 것이다. 형의 품이 넓은 것은 고난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어둠 속에서 아예 심지를 꺼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불꽃이 그 형 가슴 속에서 아직도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어두울수록 불꽃은 더욱 쉽사리 잠들지 않을 것이다.

이른 새벽 수도원, 주일 새벽미사를 봉헌하였다. 마당엔 수도원 배밭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화톳불을 피우고 손을 쬐고 있었다. 이제 봄이 오고 있다. 오늘은 오늘의 농사를 지어야 한다. 우리 모두.

/한상봉 2008.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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