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만두 (UCAN) -- 디푸 카세라(10)는 몸을 앞으로 굽혀 앞에 있는 접시에 담긴 차를 마신다. 두 손은 있어도 전혀 쓰지를 못한다.

뇌성마비인 카세라의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손을 움직이거나 또박또박 말을 하지는 못한다. 수도인 카트만두에서 서쪽으로 거의 400km 떨어진 수르켓현에서 온 그는 성 하비에르사회복지센터에 가장 늦게 들어왔다.

예수회에서 38년 동안 운영하고 있는 이 사회복지센터는 네팔의 여러 지역에서 온 가난하고 장애가 있는 소년 85명이 교육을 받고 각자 재능에 따라 기술을 습득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알록 차우다리는 이 센터에 오게 된 경위를 떠올리면서, “고향인 도다르파에서 8살 때 뇌막염을 앓고 나서부터 걷지 못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 센터의 기숙사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던 중 UCAN통신에 “가난했던 아버지는 8년 전 치료를 위해 나를 카트만두로 데리고 왔지만 의사들이 내가 다시 걷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나를 이곳에 맡겼다”고 설명했다.

힌두인인 차우다리는 현재 지방의 한 대학에서 경영학을 배우고 있다. 그의 목표는 “삶에서 번듯하게 성공하는 것”이다.

이 센터 소장 노버트 드수자 신부(예수회)는 UCAN통신에 센터 수용자들은 일단 교육을 끝마치면 “자기 삶을 스스로 꾸려가야 한다”고 말하고, 센터에서는 이들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2년 동안 장학금을 준다고 덧붙였다.

이 센터 의료지원팀의 아닐 부다토키는 이곳 장애아동은 정기적으로 침을 맞고 물리치료도 받는다고 말했다. 자신도 이 센터의 도움을 받았다는 그는 UCAN통신에 “대부분의 경우 의사들이 포기하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아이들이 우리의 치료를 통해 마음에 안정이라도 찾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한다”고 말했다.

불교인인 비르카 바하두르 타망은 8년 전 골결핵으로 걸을 수 없게 돼 이 센터에 들어왔다. 그는 기숙사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학교에 갈 준비를 하면서 UCAN통신에 “여기서 행복하게 지낸다. 공부를 마치고 직접 생계를 꾸려갈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2년 전 이 센터에 머무는 동안 공부를 마친 솜베르 갈레이(20)는 자기 경험을 얘기하는 내내 얼굴에서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힌두인이었다가 나중에 가톨릭신자가 된 갈레이는 UCAN통신에 “부모님은 가난해서 나를 키울 여력이 안 됐다. 그래서 나를 여기에 맡긴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센터에 있을 때 매달 받은 장학금을 모아 지금은 컴퓨터수리강좌를 듣는다.

그는 “학교 공부를 끝낸 뒤 기숙사에서 나왔다. 이제 전자공학 학위도 마쳤으니, 근사한 일자리를 찾아 자립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이 센터는 미국인으로 나중에 네팔에 귀화한 토마스 에드워드 가프니 신부(예수회)가 1970년에 시작했다. 가프니 신부는 처음에는 빌린 장소에서 집 없는 아이들을 돌보다가 곧 땅을 사서 시설을 지었다. 가프니 신부는 1997년에 살해됐는데, 이유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통계청에 따르면, 네팔은 인구 2600만명이며, 5-14살 사이 어린이는 790만명으로 이 가운데 거의 20퍼센트는 학교에 다녀본 적이 없다. 1996년에 시작해 10여년 넘게 이어진 마오주의자의 반란으로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농촌지역 어린이들의 학교 공부가 더 어려워졌다.

수도 카트만두를 포함한 네팔의 도시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리는 가난한 어린이들을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어린이 인권을 위해 일하는 기구인 네팔아동노동자센터에 따르면, 카트만두 거리에는 해마다 전국에서 어린이 500명 이상이 몰려든다. 그러나 어느 기구도 정확한 숫자를 대지는 못한다.

[한국어판 UCAN통신 NP04326.1482 2008년 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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