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녀탕은 저 위쪽이 아니더냐

‘선녀와 나뭇꾼’ 노래를 듣다 보니 마음이 훌쩍 고국의 설악산 선녀탕 가에 내려앉는다. 연휴를 맞아 지난 한 주를 정리하며 다음 주를 준비하는 정리시간… 우연히 귀에 들어온 노래라 추억과 함께 정감이 넘쳐흐른다. 그 선녀는 어디에 있을까? 나무꾼은 무얼 할까? 최근 전해들은 이야기가 되뇌어진다. “선녀가 아이들 낳아 나뭇꾼과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너무너무 금실 좋은 부부로 살다 보니 선녀는 하늘나라에 갈 생각을 아예 잊어버리고… 그러다 보니 하늘나라에 있던 다른 선녀가 시샘이 나 버릴 수밖에… 너무도 행복해 하는 그 모습이 부러워 선녀가 하느님께 떼를 써서 자기도 선녀탕에 내려오고… 날개 옷을 벗어 나무에 걸어두고 또 다른 나뭇꾼을 기다리는데… 이를 어쩌나 도대체 나뭇꾼이 선녀옷을 가져가지 않네. 눈이 빠져라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는데 일하던 나무꾼이 훌쩍 사라져 버리고…

이를 어쩌나… 선녀 몸은 물에 퉁퉁 불고 입술은 추위에 파랗게 변하고…

그때 저만치 떨어진 물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게 있었으니, 산신령이 아닌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왔느냐?’ 질문을 한다. ‘선녀탕 아닌가요?’ 대답은 했건만… ‘번짓수를 잘못 찾았도다 여기는 금도끼 은도끼 탕이니라 선녀탕은 저 위쪽이 아니더냐’ 말하며 산신령이 사라져 버린다.”는 이야기다.

‘선녀탕 이야기’ 웃자고 나온 이야기겠지만 의미도 담긴 이야기이다. 삶의 고개 한 구비를 지나 잠시 쉬면서 호흡을 가다듬게 된다. 그러다 다시 맞는 새로운 장을 걸으며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 란 화두가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KNOW WHERE

“KNOW WHERE!”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을 제대로 알고 그 자리에 있는 게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그 동안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심이 간 “KNOW HOW” 는 점점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방법은 누구나 거의 다 안다. 핵심은 내가 ‘어디에 있는가’로 모아진다. 택시 운전을 하면서 봐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다가온다.

있어야 할 장소와 때를 아는 것보다 그 때 그 자리에 있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새벽에는 어디에 있어야 하고, 낮에는 어디에서 기다리고, 금요일 토요일 저녁에는 어디에 있어야 좋은지를 알고, 그 자리에 있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말 그대로 KNOW WHERE 이다. 있어야 할 곳에 있을 것을 알고 행동하는 게 필요하다. 택시손님이 원하는 바를 알고 써비스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고, 부부간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부모가 아이들 있는 곳을 알고 그 마음 둘 곳까지 안다면 더없이 좋을 법하다.

부부가 서로 있어야 할 자리를 알고 제 위치에서 역할을 하는 게 먼저일 테고…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것 같다. 내가 그분 편에 서서 내 할 일을 즐겁게 하면 그게 그 분 보시기에도 더없이 좋을 듯싶다. 내 마음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알고, 지향해야 할 목표가 어딘 줄 안다면… 내 몸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알고, 그 곳에 있는 내 현실을 바라보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에 그 분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따른다.

오래 전부터 좋다고 소문으로만 들어오던 Coatesville에 있는 Life Style의 Kiwi(뉴질랜드 현지인) 가정집을 방문하고서 받은 감동의 메아리가 아직도 은은하다. 대문을 들어서니 호수가 한편의 그림처럼 시인의 은은한 시처럼 시야에 들어오는데 평화 그 자체다. 20여년 가꿔 왔다는 삶의 터전, 누가 봐도 Paradise! 천상의 낙원이 아닌가. 그러기에 8달러 입장료를 내고도 많은 이들이 찾는다. 뉴질랜드의 꽃이란 꽃은 다 호숫가 정원 곳곳에 자리해 제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구름다리를 통해 연꽃의 향연을 즐기며 걸어가니 팔각정 형태의 정자가 의자를 내밀며 손짓을 해온다. 쉬어가는 마음으로 벤치에 앉아 앞을 보니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다. 온갖 물새가 노래를 하고 앵무새가 인사말을 하고…

언제부터 인가 마음속에 그려온 명상의 집, 아니면 피정센터가 바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곳곳을 묵주기도 길로도, 14처 십자가의 길로도, 나눔의 안식처로 쓴다 해도 손색이 없는 곳이다.


엄마 새가 날아와 날개로 감싸며

하얀 구름이 호수에 내려와 평화롭게 흘러간다. 호숫가를 거니는데 잔디 위에 두꺼비 같은 게 몸을 뒤척인다. 가까이 가보니 명지 깃털도 다 빠지지 않은 갓난 새끼 새일 줄이야. 계속 뒤척거린다. 어떡하나 새끼는 몸도 잘 못 가누고 눈도 잘 못 뜨니 그야말로 NO WHERE다. 길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엄마 나 어떡해?”다. 엄마 새가 새끼 먹이 찾으러 나간 사이에 새끼가 외출하다 길을 잃은 모양이다. 그 때다.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엄마 새가 날아와 날개로 감싸며 먹이를 먹여준다. 엄마는 다르다. KNOW WHERE다. 내 새끼가 어딜 가도 어디 있는 줄을 안다. “아가야! 이 다음부턴 혼자 집 나오면 안돼. 알았지?”다. 이제 세상이 바뀌고 있다..

부부간에도 똑같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의 마음 둔 곳을 알아 헤아려 줄 때 가정 행복이 피어나게 마련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민심이 어디 있는 줄 모르면 천심을 잃는 세대다

개인적으로나 사회관계 속에서도 현재 내 몸과 마음이 어느 곳에 있어야 함을 아는 것, 그게 바로 필요할 듯싶다. 그러기 위해선 내 위치 점검, 현실 점검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행동으로 옮겨지는 “KNOW WHERE”적 삶이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물어보는 사람은 5분 동안만 바보가 된다. 묻지 않는 사람은 영원한 바보가 된다.” 는 중국 속담이 떠오른다. 신앙 안에서도 사회적으로도 가정 안에서도 내 위치를 묻는 것, 어쩜 그게 기도이고, 대화이고 행동이 아닐까. 한 나라도 마찬 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KNOW WHERE”,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을 아는 것”이 우리 개인이나 가정생활, 사회조직, 국가관리 체계 속 어디에나 배어나야 할 성 싶다. 내가 발 딛고 있을 곳을 알고, 마음 둘 곳을 아는 것의 기본은 상대의 마음으로 다가가는 겸손에서 비롯됨을 다시금 새겨본다.

/백동흠 2008-05-26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