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를 운전하다 손님을 내려주고 근처 성당에 시간 맞추어 매일 미사를 드릴 수 있는 날은 큰 은총입니다. 서울의 명동 성당 격인 오클랜드의 Patrick 주교좌 성당에서 평일 미사가 거의 끝날 무렵입니다. 미사를 집전 하시던 키위(뉴질랜드 현지인) 신부님께서 미사를 함께 드리던 신자들에게 양해 말씀을 구하십니다.

“오늘 이 미사를 마치면서 이 시간에 남 달리 특별한 의미가 있는 두 분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55년 전 오늘, 우리들이 들어왔던 저 성당 앞문을 통해 신랑, 신부로 입장해 혼배 미사를 치렀던 젊은 청춘 남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함께한 세월 55년 후 오늘도 같은 문을 통해 두 분이 들어와 이 미사에 참례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이 그들에게는 감회가 깊은 순간이라 생각됩니다. 그 분들을 모시겠습니다. 자, 그럼 두분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궁금증으로 가득 찬 채 주변을 둘러봅니다. 중간 좌석쯤에서 팔순의 노부부가 다소곳이 일어서시는데 겸연쩍어하는 모습입니다. 다정히 손잡고 제대 앞으로 걸어 나오자 성당 안에서 이를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축하의 박수를 칩니다.

신부님 앞에 두 분이 서시자 신부님께서 두 분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 기도를 해주십니다. 55년을 함께한 부부의 인연, 그 분들은 세상의 온갖 풍파와 우여곡절의 고개를 담담히 넘어와 황혼의 아름다움을 잔잔하면서도 은은하게 전해 줍니다.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에 뭉클한 감동을 안겨 줍니다.

기도가 끝나자 두 노부부께서 돌아서서 신자들을 향해 공손히 인사로 답례를 합니다. 다시금 뜨거운 박수의 환호가 이어집니다. 그러자 신부님께서 다시 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두 분이 혼배 성사로 부부의 인연을 맺은 뒤 11년 뒤 낳은 아들도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44세가 되었나요? 그 아들도 인사 드리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또 다시 모든 이들이 궁금해 하는 모습으로 이리 저리 고개를 움직입니다.

그러자 신부님께서 두 노부부 앞에 나와 조금 전 노부부처럼 신자들을 향해 더욱 공손하게 허리 굽혀 인사를 합니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모든 신자들이 자리에서 일제히 일어나 신부님과 두 노부부를 향해 힘찬 기립 박수를 보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

이 얼마나 신선한 감동의 자리인가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

박수소리가 어느 정도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 후 다시 신부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이 두 분이 바로 저의 어머니이시고 아버지 이십니다. 오늘 이 자리까지 저를 키워주시고 보살펴준 부모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항상 지혜로 모든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사제의 길로 잘 인도해주시는 사랑의 하느님께 이 모든 감사와 영광을 바칩니다”

다시금 힘찬 박수가 이어집니다. 그러자 세분이 함께 답례의 인사를 신자들을 향해 드린 뒤, 돌아서서 제대와 십자가를 향해서도 더욱 정성스레 인사를 올립니다. 가슴 뜨거운 벅찬 감동의 물결이 온 성당 안에 가득 차고 넘쳐 납니다. 감동 그 자체입니다.

그 어떤 강론이 이처럼 생활 속에서 살아있는 행동 말씀으로 가슴에 다가오겠습니까. 평일 미사는 그것으로 마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다시 평상으로 돌아갑니다. 보이는 행사를 위해 특별 소품이나 꽃다발이 준비되지도 않으면서 깜짝 행사의 진수를 그대로 가슴에 안겨준 그날의 단순한 진행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언제 생각해도 감동으로 가슴에 남아있는 자연스런 정경입니다.


알고 이해하고 깨닫는 것

무엇을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또한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은 또한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한 단계 더 나아가 무엇을 ‘깨닫는다’는 것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며 감동을 안고 사는 만물의 영장으로 살아갑니다. 뉴질랜드에 살면서 참으로 고마운 것은 생활 곳곳에 감동의 씨앗이 이렇게 배어있고, 자연 속에 그대로 간직 돼 있는 깨달음의 진수들이 때에 맞게 우리네 가슴을 두드립니다. 그리고 그때 그때마다 그 소리에 다가서는 열린 마음을 갖게 해주는 것이 참 기쁨이고 평화입니다.

눈에 보이는 빙산이 그 빙산의 본 모습 전체는 아닌데, 그 보이는 빙산 1%가 전체인양 거기에 머물고 마는 경우가 참으로 허다한 듯 싶습니다. 머리로 인식하고 머무는 게 바로 ‘안다’는 게 아닐까요. 그걸 입으로 말하고 공감하는 것을 ‘이해한다’는 선상에 오르는 것일 테고, 이해한 것을 자기 생활 속에 기쁨으로 표출해내는 것이 ‘깨닫는다’는 단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살짝 드러난 행동에서도 그 내면의 본 모습을 읽을 수 있다면 쉽게 판단하지 않을 것이고 배려 있는 다가섬이 따르게 마련이겠지요.


너무 좋은 자연과 감성지수

택시 손님들과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 보면 가끔씩 “뉴질랜드, 무엇이 좋으냐”는 질문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자연스레 나의 입을 통해 나오는 대답이 한결같습니다.

“물질문명과 지능지수(IQ-Intelligent Quotient)보다, 아름다운 자연과 감성 지수 (EQ-Emotional-Quotient)가 높아서 좋다고…”

수수해 보이고 화려하지 않아도 가슴을 적셔주는 오래가는 꽃향기처럼 은은하게 그 좋은 기운이 남아서 좋습니다. 곱게 세월을 다져온 두 노부부처럼 여름날 그늘 드리워주는 한 그루 나무로 서고 싶습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사제의 마음같이도…

하얀 로만 칼라와 검은 수단 자락에서 나오는 단순함과 주제가 있는 메시지가 그립습니다.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말하고, ‘가슴으로 다가서는 향기’가 되고 싶습니다.


/백동흠 2008-04-28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