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사람, 푸른 사람들”을 기치로 함께한 자리, KOREAN DAY, ‘한인의 날’이 성황리에 펼쳐지면서 만나는 마음들이 즐겁다. “Open Society, People in Harmony”라는 슬로건이 매우 인상적이라며 악수를 나눈 스탠 페넬 할아버지의 따뜻한 관심이 참 고맙다. 가슴에 여러 훈장과 함께 한글로 새겨진 ‘한국 참전용사’ 배지가 유독 빛나 보인다. 57년 전 20대 초반의 나이에 뉴질랜드 육군으로 가평 전투에 참여했다는 그때 그 시절을 생각만 해도 감회가 깊으시단다. 한인의 날에 할아버지와 함께 초대된 80대 노 부부의 동행이 퍽이나 고와 보인다. 전투에 함께 참여했던 그 많은 전우들이 세월의 수레바퀴 뒤에 묻히기도 하고, 노환으로 홀로되어 외롭게 보내는 이 있다면서 마음이 안타까우신지 잠시 멀리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신다.


이름은 잊었지만 병약한 몸 앞에 훈장도 내려놓은 듯한 다른 할아버지 얼굴이 떠오른다. 포인트 쉬발리에 리타이어먼트 빌리지에서 비 오는 저녁 무렵 택시를 부르기에 도착해 보니 아무도 안 보였다. 작은 유니트 집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보니 나이 많은 할아버지 한 분이 지팡이에 의지한 채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 부축하여 힘든 몸을 자리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매어드린 뒤 출발하려니 지긋이 바라보시며 고맙다는 표정으로 내 손을 꼭 쥐어 주셨다.

“할아버지를 뵈니 제 아버지가 생각이 나서요. 그래서…”

그 뒤 자연스레 이어진 대화 속에 6.25 한국 전쟁에 본인이 통신기술병으로 참전하셨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택시운전하며 처음 만난 참전용사 손님이었다. 가슴에 묘하게 어우러지는 인연의 세월이 고국에서 뉴질랜드로 이어져 온 느낌이었다. 고국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대구 영천 전투에서 인민군과 접전 중에 왼손에 가벼운 총상을 입어 한 때 고생을 하셨다 들었는데…

세월에 장사 없다더니 할아버지에게도 지금은 노환이 겹친데다 홀로된 여생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해 부축하여 쇼핑몰 입구까지 바래다 드리니 멈칫하고 서 계신 채 연신 고맙다 하시는 데… 택시요금이 $15 정도 나왔던 것 같은데 돈을 내민 그 손에 다시 쥐어 드렸다. 그 어려운 시절 우리나라를 지켜 주셨는데 그 땀 한 방울 값에도 미치지 못할 마음인 것을…

그렇게 만난 인연만으로도 고마웠다. 금요일 저녁 바쁜 시간에 멀리 가는 손님, 도착하자마자 지체 없이 곧 바로 타는 손님, 즐거운 대화에 내릴 때 팁까지 주는 손님도 있지만 어디 그게 다일 수야 있겠는가. 내 욕심이지. 스스럼없이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나를 이끌어 주는 힘이 고마운 것이다. 몸이 불편한 참전 용사 할아버지를 만나던 날, 참 많이도 내 관습의 껍질을 깨뜨린 것 같다.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사라지는 작은 손길 하나 하나가 디딤돌처럼 역사도 되고 선물도 되고 신비로도 다가 오는 것임을.

지난번 아시아 뉴질랜드 재단이 장학생으로 선발한 뉴질랜드 10대 소녀 브리지드 보일양의 에세이 <할아버지 윌리엄 머레일 이야기>가 인상 깊다. 한국전에 참전한 할아버지께서는 ‘스스로 자신들의 권리와 자유를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지키고 보호 하는 게 도덕적 의무라 생각하며 참전 용사의 보람을 느끼신다’는 대목이었다. 그 마음이 씨앗이 되고 뿌리가 되는 사회, 그 자손들이 일구어 나가는 나라, 그리고 그 세계…

4월 25일은 뉴질랜드 현충일인 안작 데이(ANZAC DAY)이다. ANZAC은 호주 뉴질랜드 연합군의 약자(Australian and NewZealand Army Corps)로 전쟁참전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기념일로 정한 국경일이다. 뉴질랜드 인구 약 400만에 한국 교민 약 2만 명, 소수 민족으로서도 여러 분야에서 함께 가고자 발돋움하고 있다. 작은 인구를 가진 나라임에도 세상의 온갖 크고 작은 전쟁과 내전에 참가해 제 몫을 다 하고자 하는 것을 보면 때론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면도 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뉴질랜드 총 인구 100만 명에 11만 명이 참전해 1만 8천 명이 전사하고 5천 5백 명이 부상당한걸 보면 인구 비례대비로 볼 때 가장 큰 참전 인원에 인명피해 또한 최고였다니… 이런 배경에 정부 주도로 각종 퍼레이드(각 전투 참전 용사들)와 각종 행사가 ANZAC DAY에 펼쳐지고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붉은 양귀비꽃(Poppy) 조화를 가슴에 달고 용사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곤 한다. 이 Poppy꽃 조화를 $1씩 도네이션 받으며 길가는 사람들 가슴에 핀으로 꽂아준다. 그 날은 택시 손님도 택시 운전자도 모두가 Poppy꽃을 달고 다닌다. 그리하여 전쟁에 참가한 전사자, 부상자 그리고 그 가족들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으로 1922년부터 연례행사로 잘 정착시켜 오고 있다. 세계 격전지 마다 쉽게 보게 되는 이 Poppy붉은 색 양귀비 꽃이 붉은 피 흘려 산화한 젊은이들의 넋을 기리게 한다.

그래서 그런지 뉴질랜드 각 지역마다 전쟁 기념 박물관과 기념비로 그 자취를 기리는 곳들이 의외로 많다. 오클랜드 ‘파넬 로즈 가든’에도 한국전 참전 용사비가 있어 고국에서 여행 온 모든 이들의 필수 관광 코스가 되어 그 시절을 되짚어 보게 한다. 직접 가보진 않았지만 크라이스트 처치 홀스웰 지역에도 ‘육이오 다리’라 부르는 ‘전쟁 기념 다리’가 있다고 한다. 참전 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또 다리 주변에는 ‘송파 공원’이라는 아름다운 공원도 조성되어있어 시민들이 즐겨 찾게 된다고.

뉴질랜드 정부 주요 인사와 많은 교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인의 날 공식행사 시작과 함께 울려 퍼진 양국 국가가 다시금 메아리 쳐 온다. 잘 아는 우리 애국가 가사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에 뉴질랜드 국가 마지막 구절 ‘God Defend Newzealand’(하느님께서 뉴질랜드를 보호하시네)가 서로 같은 화음을 낸다. 두 나라 모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니, 이 또한 고마운 일이다. 한인의 날 기치로 건 ‘PEOPLE IN HARMONY’가 더욱 푸르게 빛나 보인다. 


 /백동흠 2008-04-14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