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아래로 흐르며 수많은 생명체와 인간에게 안식과 삶의 평화를 전해준 달래강. 달천은 오늘도 세상사의 운하 논란에도 말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하 사진출처: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


또 길을 떠난다. 가방을 메고 운동화 끈을 찔끔 당겨 꼼꼼하게 묶고서 집을 나선다. 깊은 밤 어둠보다 더 어두운 신 새벽이다. 차량의 이마에 붙은 시계가 다섯 시를 알려준다. 아직은 이른 시각임을 나타내는 파란숫자가 추워 보인다. 양력으로 삼월 초하루지만 아직도 바람이 날카롭다. 남해고속도로를 거쳐 45번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내달린다. 요즘 새로 만든 도로들은 직선에 가까운 모습들이다. 그래서인지 차 안에서도 속도가 느껴진다. 길 앞에 높은 산이 나오든 낮은 산이 나오든 도로는 산들의 가슴을 뚫고 달린다. 터널을 들어갈 때마다 뻥하고 소리가 나고, 뻥 뚫린 부모의 가슴을 후미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질 않다. 오늘따라 터널들은 하나같이 길었다. 마치 새벽의 어둠처럼.

어머니 젖줄 같은 강은 무심히 흐른다

도착지에 이르니 타고 온 차가 부르르 몸을 떤다. 강바람이 차갑나 보다. 강둑에는 길에서 잠을 청했던 사람들의 텐트와 침낭이 보인다. 충주시 살미면의 수주팔봉 곁으로 달천이 흐르고 있다. 물맛이 달아서 달천인가 보다. 그곳에서 일행이 일행을 만났다. 경기도 김포 애기봉을 출발한 ‘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은 스무날 째 강을 따라 걷고 있다. 같이 온 경남생명평화결사의 등불들이 그들에게 두 손 모아 인사를 했다. “힘드시죠.” “괜찮습니다. 멀리서 일찍 오셨군요.” 서로에게 건넨 한 마디로 충분했다. 어느덧 이제는 한 행렬이 된 그들 곁으로 어머니 젖줄 같은 강은 무심히 흐른다.

“더불어 길을 떠남으로 해서 온 누리 생명이 되살아나는 순례가 되기를 바란다.”는 홍현두 원불교 교무의 기도로 하루 일정이 시작되었다. 일행의 길라잡이가 가는 길을 설명해준다. “순례단이 달천 상류로 방향을 정한 것은 경부운하 계획안 중 하나가 속리산 노선(일명 하늘길 노선)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숙박하였던 수주팔봉 남측으로 조령터널 방안과 관련한 리프트 시설이 설치될 예정이며, 속리산 노선은 달천 상류의 괴산댐과 관련한 계획안입니다. 순례단이 경유하는 달천은 운하 계획이 어떻게 결정되든 모두 수로로 이용되는 구간이며, 그동안 소식에서 전한 바와 같이 수몰이 예상되는 지점입니다. 그렇기에 달천 상류로 이동하며 달천의 생생한 모습을 보기 위해 괴산댐 방향으로 순례를 결정하였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이 전문건설용어겠지만 말이 되어 나온 조각난 단어에 가슴이 마구 뛴다. 강 이야기를 하면서 하늘 길과 리프트는 무엇이고 운하를 위한 수로터널과 수몰은 또 무슨 말인가.


강과 산이 온전해야 그 안의 사람도 온전한 것이다

생명의 근원인 강을 따라 걷고 또 걷는다. 때 아닌 눈발이 날린다. 삼월의 눈을 길 위에서 맞는 것은 남부지방 사람으로서는 드문 일이다. 눈이 멈추자 뒤따라온 것인 냥 황사가 먼 하늘부터 뿌옇게 물들인다. 강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도 아니고 우리가 만든 것도 아닐진대 강은 우리가 잠시 빌려 쓰는 것이다. 강뿐만 아니라 산과 바다며 자연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져야한다. 그저 미안한 마음이고 부끄러운 마음이다. 걸어가고 있는 순례단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것은 가슴속에 품은 마음인가, 황사 바람인가. 강과 산이 온전해야 그 안의 사람도 온전한 것이다.

문경새재의 산등성마루에 내리던 빗물이 남북을 달리하여 한강과 낙동강으로 흘러내린 것이 태초에 누구의 마음이었을까? 이제 그곳 642미터의 문경새재로 화물선이 넘어가려 하고 있다. 월악산 옆구리로 20km가 넘는 수로터널을 뚫어 배가 산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다. 그곳은 석회암지대라고 하니 터널바닥을 방수처리 한다고 한다. 아, 제발 슬픈 코미디를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울면서 코미디를 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남한 인구의 절반이 훨씬 넘는 3천4백만 명은 에비앙을 먹는 것이 아니라 한강과 낙동강 물을 먹고 산다. 그러기에 강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 생명수인 것이다. 어머니의 젖인 것이다. 그곳으로 우리는 수천 톤의 바지선이 다니려 마음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것은 고승의 화두가 아니라 지금여기의 우리가 사는 곳을 알려주는 예언이었다.

한 개의 산맥인 백두대간과 열네 개의 정맥으로 이루어진 나라. 그곳은 우리가 한반도라 이름 부르기 전부터 산맥으로 동해바다와 서해바다를 가르고, 강과 강을 갈라 여기에 이른 것이다. 산맥과 정맥, 산과 강의 역할을 막으려 하는 자 그대는 누구인가? 수로와 운하가 뭔지도 모르고 10년 후 100년 후는 더더욱 모르고 오로지 경제라는 말로 둔갑한 ‘돈’이 목표인 그대는 누구인가? 한강과 낙동강과 금강과 영산강을 통째로 막아 유람선과 바지선이 둥둥 떠다닌 그 물을 마시려 하는 자 그대는 도대체 누구인가?


달디 달은 물맛으로 고향이름을 지은 옛사람들

점심밥을 길 위에서 나누어 모시고 괴산군 감물면에 이르러 하루 일정을 마무리한다. 시작지점이 달천이더니 도착점이 감물이다. 다음 날 일정이 달래강인 것을 보니 온통 이곳은 달디 달은 물맛으로 고향이름을 지은 옛사람들 생각에 더 부끄러움이 생긴다. 풍경소리 발행인 김민해 목사가 마무리 기도를 올린다. “고맙습니다. 저는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 부끄러운 마음으로 참여했습니다. 이런 부끄러움이 나 개인에게 힘이 되고, 본래 종교인으로 가야 할 길을 가는데 귀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강물처럼 유연해지기를 바라며, 강이 모여 바다로 모아지듯이 우리의 한 걸음 한 걸음도 함께하는 여정이 되길 바랍니다.” 땅 디딘 발아래로 생명의 강은 흐르는데 황사는 점점 더 심해진다.

/김유철 2008.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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