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21]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가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아니하냐.....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입지 못하였다.....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26-31) 

공중의 새를 보라

제자가 스승에게서 위와 같은 요청을 받는다면 그 제자가 우선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당연히 공중의 새를 ‘보고’,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보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입는 데서 오는 걱정의 부질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다. 만일 먹고 마시고 사느라 걱정한다면 제자의 자격이 없다 할 것이다. 제자라기보다는 도리어 ‘이방인’일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단순한 사실 하나: 성서는 인간에게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이다. 그 이정표를 따라 그 길을 가면 된다. 만일 그 길을 가지 않는다면 그에게 그것은 이정표가 아니고 당연히 성서가 아니다. 성서는 그 자체로 거룩한 책이 아니다. 신을 믿지 않는 이에게 신이 거룩할 리 없듯이, 읽지 않는 이에게 성서가 ‘거룩한 책’일 리 없다. 읽어도 그 내용을 삶 안에 가지고 오지 않는 이에게 성서가 거룩할 리 없다. 성서가 그 자체로 거룩한 책이라며 우기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을 문자 안에 가두는 문자우상숭배를 범하게 될 공산이 크다. 공중의 새를 ‘보라’는데 정작 새는 보지 않고 새를 보라는 문자 안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보라’는 데 들꽃은 보지 않고 들꽃을 보라는 문자만 분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학문의 위험성

어떤 아마존 탐험가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사람들은 열이 나서 아마존에 관하여 모든 것을 샅샅이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탐험가는 거기서 기막히게 아름다운 꽃을 보았을 때나 한밤에 숲 속의 소리를 들었을 때에 가슴에 용솟음치던 그 느낌을 말로 다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맹수의 습격을 받았을 때, 혹은 변덕스러운 물살을 가로지르며 쪽배를 저어갈 때 가슴 속에서 절감했던 그것을 도대체 전달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탐험가는 ‘직접 찾아가 보세요.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며 아마존 지도를 한 장 그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지도를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그것을 액자에 넣어 마을 회관에 걸었고, 제각기 사본을 떠가기도 했습니다. 사본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아마존 전문가로 자처했습니다. 강은 어디서 굽고 어디서 소용돌이치며, 이곳과 저곳의 너비와 깊이는 얼마이며, 어디쯤 급류가 있는지, 폭포는 어디 있는지, 아마존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아마존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탐험가는 지도를 그려준 것을 평생 후회했습니다. 아무 것도 그려주지 않았다면 차라리 낳았을 것을 하며... (앤소니 드멜로, <종교박물관> 중에서)

글을 길로 바꿔라

▲ "예수를 거친다"는 것은 예수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이다.

예수는 글을 남기지 않았다. 조상 적부터 전해오던 글을 읽고 그것을 몸으로 살았을 뿐이다. 그래서 ‘길’로 불리게 된 분이다. 한 마디로 예수는 ‘글’을 ‘길’로 바꾼 분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고백하는 구절은 타당하다. 타당하되, 그 자체로 타당한 것이 아니라, 그 ‘글’이 오늘 다시 ‘길’로 바뀌는 현장에서 결정적으로 타당하다. 그 현장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는 글이 살아있는 길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나를 거친다(말미암는다 또는 통한다)”는 역사적 예수의 유일회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장 그대로 읽으면 그것은 진리이자 생명 자체인 길을 걸음으로써 아버지께로 이른다는 단순한 사실만 말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적 예수가 훌륭하다는 사실을 찬탄하는 데 최종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랬듯이, 그 글을 읽는 이로 하여금 진리이자 생명인 길을 가도록 이끄는 데 궁극 목적이 있는 것이다. 진리와 생명의 길을 걸음으로써만 진리와 생명이신 아버지께로 이르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나를 거친다(말미암는다/통한다)”는 것은, 그 ‘나’가 예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때, 예수에게 자극을 받고 예수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이다. 그것이 길이신 “예수를 거친다는” 말의 단순하고 진정한 의미이다. 그렇게 예수를 통할 때, 예수가 하느님 안에 있듯, 그이는 예수 안에 있게 된다. 더욱이 예수 안에 하느님이 있다면, 그이 안에도 하느님이 있게 된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요한 14,20)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예수와 같은 길을 걷다 보면, 예수와 같은 목적지, 즉 하느님과의 온전한 상호 내주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종이 아니라 벗

예수와 같은 길을 걷는다는 말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풀다 보면 다음 한 문장에 이르게 된다: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 예수와 같은 길을 걷는다는 추상적인 듯한 말은 서로 사랑하는 데서 가장 구체성을 띄게 된다. 예수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는 이는 나의 친구”(요한 15,14)라고 말한다. 서로 사랑하며 사는 이를 예수는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며 사는 이가 곧 예수의 벗이다. 예수의 제자에게 예수는 저 구름 너머에 있는 초자연적 존재이기를 넘어, 불교식 표현을 빌면 진정한 도반(道伴)이다. 인생의 길을 먼저 걸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함께 걷는 벗이다. 예수를 벗으로 삼고서 진리의 하느님을 찾아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이 인생이다. 적어도 예수의 제자라면 그렇다. 그 길을 가되, 서로 사랑하며 갈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하느님 안에 예수가, 예수 안에 벗들이, 그리고 벗들 안에 예수가, 예수 안에 하느님이 계시는 순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인생은 진리를 찾아가는 길 위의 존재이다. 그 길이 생명의 길이다. 그리고 생명의 길은 서로 사랑하는 길이다. 그런 삶이면 충분하고 넘친다. 설령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사랑하며 사는 이가 있다면 그이는 예수의 벗이라는 소리를 들어 마땅하다. 목숨바쳐 사랑하는 이는 실제로 예수 최고의 벗이자 마침내 예수와 하나 된다. 그렇게 사랑하는 삶이 교회라는 조직이나 제도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 테니, 교회 밖에도 안에 있는 사람 못지 않게 사랑의 삶을 사는 예수의 벗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견성성불

그리스도인들도 견성해야 한다.
우리나라 불교는 선 전통이 강하다. 선불교의 정신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로 요약된다. 네 문장의 핵심을 요약하자면 문자 너머의 진리(性)를 그대로 보는(見) 것이다. ‘견성’(見性)이 관건이다. 사물의 “본성을 보는” 것이다. 본성을 보지 못하고 그 외양만 보고서 무언가 아는 척 하는 인간의 실상을 고발하는 문구이기도 하다.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그 손가락 너머의 달을 보아야 하는데, 손가락만 보는 현실을 폭로하는 경구이기도 하다. 창문을 넘어야 정원이 보이고 산야가 펼쳐진다. 사물을 더 잘 보라고 안경을 끼워놓고는 렌즈만 쳐다보려 해서야 되겠는가.

마찬가지이다. 문자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문자가 가리키는 세계를 보아야 한다. 공중의 새를 ‘보고’ 자연의 섭리를 느끼는 것이 책 속의 문자를 들여다보고 전문적인 뜻풀이를 하는 것보다 더 예수적이다. 역사적 예수에조차 매이지 않을 만큼 예수적인 삶을 사는 것이 예수를 ‘통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를 통하는 것은 예수의 본성을 보아 예수처럼 사는 것이다. 제자에게 사물의 본 모습(性)을 보는(見) 것이란 그런 것이다. 스님들만 견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견성해야 한다. 그것은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아는 것”(1고린 13,12)이기도 하다. 여기에 신분이나 종파나 조직이나 제도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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