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에서 진리를 증언하는 사람들]

베렌프리드 신부(1913-2003)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47년 크리스마스 때부터다. 벨기에의 한 작은 수도원에서 출판하는 소식지에 “여인숙에 묵을 방이 없다.”라는 글이 실린 것이다. 이 기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전쟁이 남긴 파괴와 참화, 그리고 머물 곳이 없어 떠돌아다니던 수많은 전쟁 이재민들의 처지를 절절하게 묘사하여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 한편의 글 덕분에 ‘곤궁한 교회를 돕는 모임’이라는 국제원조 기구가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 검은 모자에 모금을 받은 베렌프리드 반 스트라텐 신부.
베렌프리드 반 스트라텐 신부는 1913년 1월 17일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교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교육자의 길을 걷기를 원했지만 베렌프리드는 성소에 이끌려 스물 한 살의 나이로 벨기에의 노르베르틴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1945년 2차 대전의 포성이 멈췄지만 갈 데도 없고 묵을 데도 없는 난민들은 그저 무리를 지어 떠돌고 있어 유럽전역은 거대한 수용소와 같았다. 특히 패망한 독일에는 동유럽에서 쫓겨 온 독일계 난민들이 1천4백만 명이나 몰려들어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독일에서 모두 수용되지 못한 난민들이 인근 국가들까지 가득 채웠지만 전쟁을 일으킨 책임이 있는 독일민족을 난민으로 받으려는 나라는 아무 데도 없었다.

이런 와중에 우연히 난민 수용소를 방문한 베렌프리드 신부는 그들의 모습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수도원에 돌아왔을 때 마침 사제들의 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사제들에게 독일인들도 인간이며, 설령 이들이 전쟁을 일으킨 민족이지만 하느님 자비의 은총은 죄인들까지 어루만진다고 하며 이들을 돕자고 제안했다. 베렌프리드 신부는 피정 참석자들에게 즉석에서 모금을 받았다. 이때 돌렸던 자신의 검은 모자는 베렌프리드 신부가 그 후 평생토록 전 세계를 돌면서 동냥을 청했던 유명한 모자가 되었다.

피정이 끝나고 얼마 후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신부가 자기 본당의 추수감사절 축제에 베렌프리드 신부를 초청하였다. 그 기회를 이용하여 베렌프리드 신부는 시골 아낙네들에게 다 함께 난민을 돕자고 호소하면서 각자의 가정에서 돼지고기로 만든 베이컨을 구호물자로 기부해 달라고 제안했다. 당장 베이컨이 1톤이나 모였고 그 때부터 난민을 돕기 위한 ‘베이컨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는 전 세계의 가난한 교회, 곤경에 빠진 교회, 전쟁고아들을 위해 자선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늘 찾아 다녔다. 그는 세상의 누구를 만나든 “제게는 동냥을 청할 수 있는 목소리와 편지를 쓸 수 있는 펜 한 촉만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면서 까만 모자를 펴서 자선기금을 받곤 했다. 이 모습에 감동한 교황 요한바오로2세는 베렌프리드 신부에게 ‘뛰어난 자선의 사도’라는 호칭을 내렸다. 베렌프리드 신부는 2003년 90세를 일기로 선종했지만 난민들과 가난한 교회를 위해 평생을 바친 그의 정신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권은정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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