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 Letter

나이 들면서 읽는 게 이렇게 힘들어서야,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모니터는 자체발광을 해서인지 좀 나은 편이지만, 무엇인가 읽고 나서는 늘 눈을 씀벅이곤 합니다. 예전에 나이 지긋한 늙은이가 되면 뭘 할까, 생각해 본 적이 있지요. 컴컴한 헌책방 서가 사이에서 무릎담요를 덮고 스탠드 불빛에 기대어 다시 고전을 읽는 모습을 상상했었죠. 아득하고 아늑한 정경입니다. 요즘 같아서야 휴대전화로 페이스북에 올라온 기사를 읽고 있지 않을까, 씁쓸한 결과를 예상합니다. 휴대전화 정보기술이 더 발달해 다른 뭔가를 ‘예배’하듯이 쳐다보고 있을지도 모르죠. 이미 아무도 종이 책을 읽지 않지만, 책방에는 책들이 여전히 쏟아져 내리고 있으니 묘한 현실입니다.

기차가 발명되면서, 사람들이 이동 중에 책 읽는 습관이 생겼다고 하더군요. 낯선 사람과 몇 시간이고 마주 앉거나 나란히 앉아서 가야한다는 곤혹감이 승객들에게 책을 읽게 만든 모양인데, 이럴 때는 항상 시선 처리가 문제니까요. 요즘은 휴대전화로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노트북을 꺼내드는 사람이 더 많겠지요. 사무실과 집에서 하던 일을 길거리나 전철에서도 할 수 있으니 ‘경제적 일상’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쉴 틈이 없어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멍청히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 주는 ‘무언(無言)의 힘’이나, 잠시 업무를 젖혀놓고 평소 마음에 두었던 책을 찬찬히 읽어 나가는 기쁨이 사라졌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 사진출처: <읽는다는 것>, 권용선, 너머학교, 2010.
요즘엔 미사참례를 위해 집을 나설 때도 예전처럼 성가책과 성경을 들고 가지 않습니다. 성당에 성가책이 비치되어 있고, <매일미사>가 나머지를 해결해 줍니다. 어떤 교우는 휴대 전화로 모든 걸 해결합니다. 빠르고 간편하게. 우리시대의 금과옥조입니다. 긴 글은 사양하고, 기사도 ‘카드뉴스’를 선호하고, 무슨 말을 하고자 하면 “결론만 간단히” 하라고 요구합니다. 권용선 선생이 지으신 <읽는다는 것>(너머학교, 2010)에서는 프랑스 소설가 다니엘 페나크가 한 말을 인용했더군요. “책 읽는 시간은 언제나 훔친 시간이다.”

시간을 훔치다니요. 모든 일과 일 사이에는 자투리 시간이 있기 마련이고, 그 시간을 훔쳐 언제 어디서나 책 읽을 마음을 먹으라는 거지요. 매일 하루 10분씩만 책을 본다면 열흘이면 100분, 한 달이면 300분이 생깁니다. 300분이면 5시간이니 웬만한 책 한 권은 뚝딱 읽을 수 있다는 거지요.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쓰던 일기장에 이런 금언이 적혀 있었어요. “한 권의 책밖에 읽지 못한 사람을 두려워하라.” 사고가 편협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같아서야 “결론만 읽는 사람을 두려워하라.”고 말해야 합니다. 과정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복음’이 주는 뜻밖의 메시지에 주목해 보자고 초대하는 잡지 <뜻밖의 소식>을 발간한지 꼭 한 해가 지났습니다. 매달 본당 일괄 구독 3천부, 개인구독 1천부가 나갔습니다. 본당에서야 사제가 권하니 그저 가져갈 뿐 얼마나 마음으로 새겨 읽는지 모르죠. 더 귀한 것은 개인구독자인데, 저희가 홍보를 제대로 못해서 그런지 성적이 아주 낮은 편입니다. 저렴한 비용을 책정했지만, 가격 문제가 아니라, ‘읽는 것’ 자체를 교우들이 어려워하는 모양입니다. 어쩜 전례 중심의 가톨릭교회가 낳은 문제일지 모릅니다. 상대적으로 개신교회는 읽는 문화가 번성합니다. 저희 잡지 역시 이번 호로 휴간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쉬면서 내일을 기약할 수 있으면 다행입니다.


한상봉 편집장 / 밖의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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