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모린-20세기에 살다 간 예언자> 번역자 조세종 씨 인터뷰

<피터 모린-20세기에 살다 간 예언자>라는 책이 번역되었다. 예전에 한국에 와서 “예수는 아나키스트였다.”고 말해 깊은 감흥을 일으켰던 마크 H. 엘스가 지은 책이다. 예수는 권력화된 모든 정치세력과 종교세력에 대한 안티anti였다는 것이다. 결국 그래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내가 예수였다는 것인데, 민들레의료생협 이사장이기도 한 조세종 디오니시오 씨가 이 책을 번역했다. 그를 만나 피터 모린에 대해 물어보았다.

▲ 조세종 씨는 피터 모린이 꿈꾸었던 삶을 따라 살고 싶었다. ⓒ한상봉

“나는 오직 내가 아는 것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는 것은 가끔 내 속 깊은 곳에서 열정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는 어린이들과 어른들의 끝도 없이 이어지는 간절한 바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바람을 위해 각기 분산된 개인들의 목소리를 수백만의 목소리로 합쳐 간절한 청원을 드릴 수 있도록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는 사실에서 나는 열정을 느낍니다.” 이 글은 알베르트 까뮈가 1948년 어느 도미니코 수도원에서 행한 연설의 한 대목이다. 이처럼 종교의 힘을 믿었던 프랑스의 중년 사내가 미국에서 도로시 데이와 만나 1933년에 시작한 운동이 ‘가톨릭일꾼운동’이다. 그들은 원탁토론과 환대의 집, 농경공동체를 꿈꾸었다. 이 사내의 이름이 피터 모린(Peter Maurin)이다. 그는 ‘사람이 선해지기 쉬운 사회’를 위한 ‘푸른혁명(Green Revolution)’을 고안해 냈고, 이런 꿈을 현실로 옮긴 사람이 도로시 데이다.

마크 엘리스는 피터 모린을 20세기에 등장한 ‘예언자’라고 불렀다. 20세기는 혁명의 시대였다. “처음 혁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낡은 방식을 뒤엎기 위해 무지를 없애고 의료 혜택을 넓히며, 계몽정치로 압제정권을 대체할 것을 약속하였다. 빈곤과 압제의 고통을 덜어주는 행위는 인류이 해방을 위한 원대한 계획에 참여하는 일로, 많은 이들의 위대한 소명이 되었다.”고 마크 엘리스는 전했다. 이것 때문에 흔연히 목숨을 바치는 이들도 있었다. 히브리 예언자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예수가 모범이 되었다. 그는 ‘변화를 위해서뿐 아니라 변화에 반대하는 이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도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한 분이다. 세상의 많은 혁명가들은 가난하고 압제받는 사람들을 도우려는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에 입각한 예언자들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현대의 혁명가들에게 현존하는 교회가 걸림돌이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이다. 미신과 종교행사, 회당과 교회가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열정을 질식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브리 예언자들에게 영감을 얻었으나 과정상 예언자적 영감이 사라진 채 진행된 혁명은 불행하게도 또 다른 압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세상이 어둠을 향해 맹렬히 달려갈 때 문득 예언자의 전통과 성인의 전통을 통합시킨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곧 피터 모린이다.

피터 모린은 “정의와 내면성, 긴밀함과 증거, 말씀과 인내가 결합된” 새로운 성인다운 품성을 지녔다. 피터는 평신도, 독신, 가난한 사람으로서 특별한 소명을 느꼈는데, 지금 시대의 폐단을 폭로하기 위해 예언자들, 초기 그리스도인들, 교회의 교부들, 성인들과 교황의 가르침을 통해서 인격적인 문화를 찾았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는 것, 손노동과 지식노동의 산물을 공동체와 나누는 것, 함께 침묵하고 공동으로 전례를 드리는 것”이었으며, 무엇보다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처럼” 사랑가는 것이었다. 마크 엘리스는 피터 모린이 발견한 오래되엇지만 새로운 이 길을 “부버는 회당에서 보았고, 간디는 아쉬람에서 보았으며, 모린은 교회에서 보았다.”라고 말했다.

조세종 씨는 “피터 모린은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꿈을 꾸었던 사람”이면서, “그는 꿈을 꾸는 사람이라서, 자신의 계획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연연해 하지 않았다. 다만 새로운 아이디어와 혁신적인 생각을 끝없이 이야기해 왔다. 이상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의 꿈을 현실로 바꾸어 놓은 사람이 도로시 데이였다.”고 말했다. 도로시 데이는 늘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성인은 많지만 그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사회를 변혁시키는 성인은 없는지 물었다. 그에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사상과 방법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피터 모린이었다. 그래서 조세종 씨는 “피터 모린이 없었다면 도로시 데이도 없었겠지만, 도로시 데이가 없었다 해도 피터 모린은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도로시 데이에게 영감을 주었던 사람이 피터 모린이죠. 피터 모린은 ‘인격적 민주주의자’라고 이 책에서는 부르고 있지만, 굳이 말하자면 ‘아나키스트’라고 말하는 게 정확합니다. 그는 예수의 길을 따라 걷기로 작심한 사람인데, 자기 삶을 자신이 직접 책임지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죠. 권력이나 교회지도자에게 의지할 필요도 없이, 제 삶을 제가 책임지는 겁니다. 그가 크로포트킨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 <피터 모린-20세기를 살다 간 예언자>, 마크 H. 엘리스, 하양인, 2015.
그에게 가장 인상적인 경험은 프랑스 민주주의자였던 레옹 아멜의 방적공장이었다. 아멜은 노동착취에 반대해 공장위원회를 구성해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연합단체를 만들고, 노동자의 정당한 임금과 건강 보장을 고용주의 의무로 여겼다. 또한 건강한 육체뿐 아니라 궁핍한 영혼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수준 높은 종교적 환경을 제공했다. 노동자들은 공장 근처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주일을 지켰다. 이 성당 안에 자선단체를 만들어 아픈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도왔고, 마침내 노동자와 고용주가 모두 성 프란치스코 제3회에 가입했다. 피터 모린은 아멜의 실험에 깊이 감동했다. 한편 피터는 가톨릭사회운동에 깊이 참여하였는데, 그는 민주주의를 개인의 양심과 책임을 일깨우는 사회체제라고 믿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민주주의를 위한 계몽운동에 나섰다. 그가 여기서 실험한 것이 생산자협동조합과 소비자협동조합이다. 또한 신앙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조직된 ‘실롱’의 활동에 도으이했으나, 결국 이 조직이 일반 사회운동조직으로 변하면서 실망해서 프랑스를 떠나 캐나다로, 미국으로 이주했다.

“피터 모린은 농경공동체를 꿈꾸었지만, 도시의 공장제 자체를 대놓고 싫어하지는 않았다”고 조세종 씨는 말했다. 이는 아멜의 실험적인 노사협력적이고 종교적인 방적공장에 대한 체험 때문일 것이다. 이런 태도를 조세종 씨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각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노동의 가치보다 자본을 우위에 두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황이 ‘경제독재’라고 표현한 신자유주의 경제는 시장을 우상으로 삼고 하느님마저 상대화시키는 체제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피터 모린이 강조한 ‘종교성’이 바탕이 되는 경제와 대립하는 것이다. 교황과 피터의 생각은 공통적으로 ‘자본’ 그 자체보다는 모든 경제 행위의 이면에 가난한 이들에게 대한 배려와 일치가 깔려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그래서 피터 모린은 뉴욕에서 불어를 가르면서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받지 않고 다만 학생들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자신에게 수업료를 내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킹스톤에 있던 어느 식당에서 모린은 한쪽 벽에 상자를 걸어놓고 이런 팻말을 붙였다. “주실 돈이 있으면 넣어 두시고, 돈이 필요하면 안에서 꺼내 가도 좋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이런 실험들은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다. 25달러가 상자에서 없어졌다가, 몇 주 후에 버스비로 사용했다는 쪽지와 함께 돈이 들어 있는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피터 모린은 도로시 데이를 만나기 전까지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새로운 사회질서를 희망하는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따라서 가난한 이들을 책임지는 프로젝트였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프란치스코 제3회 회원들조차 이 일에 참여하기를 꺼리는 것을 보고 피터 모린은 당황했다. 조세종 씨는 “당시 수도회는 모린의 요청에 주교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주교들은 사회개혁을 위해 교회가 어떻게 나서야 할지 모른다며 회피로 일관했다. 피터 모린은 프랑스에서 자신이 경험한 프란치스코회의 모습과 너무 달라서 실망하는 가운데, 교회를 믿지 않고 교회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일을 알아서 하기로 결심한 것 같다. 평신도들은 교회가 움직이지 않더라도, 이와 상관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복음을 선포하고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피터 모린은 교회의 성지가즏링 자시느이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앗기 때문에 유니온 광장에서 나가서 ‘거리의 설교자’가 되었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단정한 글씨로 적어서 복사한 종이를 거리 한 모퉁이에서 사람들에게 배포했다. 그러다가 만난 사람이 <공동선> 편집자인 조지 슈스터였다. 그가 언론인이자 최근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도로시 데이를 소개해 주었다.

이렇게 도로시 데이는 교회 안에서 교회와 상관없이 일하는 ‘가톨릭일꾼운동’을 피터 모린에게서 영감을 받아 시작했다. 학자와 노동자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원탁토론을 통해 ‘의식의 명료화’를 시도했으며, 농경대학을 통해 산업사회의 대안을 찾았다. 그리고 환대의 집을 통해 가난한 이들이 원하는 당장의 필요에 응답했다.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자비의 의무를 국가에 맡기지 않고 직접 하자는 것이다. 처음엔 주교에게 모든 본당에 환대의 집을 세우고, 모든 가정에 환대의 방을 두자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조세종 씨는 “가난한 이들을 하느님의 사자로 여겨 받아들이는 환대의 집 전통이 한국교회에도 없다.”면서, “이런 전통은 오히려 성공회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세종 씨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한현 선생이 발간하던 <참사람되어>에서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을 알게 되었다면서,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번역 일을 좀 돕다가, 동네 아파트 주민들 스무 명 정도가 모여 주변의 어려운 분들을 찾아보자고 했다. 10년 가까이 대전역에 나가 노숙인들에게 김밥을 나눠주기도 하고, 미향리 사격장 등 현장에도 찾아갔다. 나중에 아예 직장을 접고 논술학원을 하면서 환경운동에 몰두했다.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사무국장까지 하게 되면서, 나중에는 민들레의료생활협동조합까지 시민사회운동에 깊이 발을 들여 놓은 상태다.

“피터 모린 책을 읽으면서 나도 그 분처럼 살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어요. 성공과 실패를 넘어서 예언자 전통 안에서, 막연하게 생각한 것을 몸으로 직접 해보자는 거죠. 조합이 자리 잡으면 세상을 위해 더 많이 기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요즘은 교황도 꿈을 꾸는 데 한국교회는 주교도 신부도 꿈을 안 꾸잖아요. 그렇지만 누구라도 먼저 피터 모린처럼 가난한 삶을 꿈꾸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복음에 따라 사는 게 필요하잖아요.”


한상봉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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