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 사회교리-10]

민중의 교회를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저 낮은 민중 속으로 보내셨듯이, 크리스챤이 또한 민중 속으로 투신하도록 이 시간, 우리 모두를 파견하고 계신다. 가난하고 버림받고 소외된 민중 속에 자신을 묻고, 그들과 함께 복음의 빛을 찾는 ‘민중 속의 교회’만이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의 진리를 가장 진솔하고 극명하게 증거 할 수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천주교 전래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의안 12권-사회)

프란치스코 교종은 “하느님은 모든 형태의 노예적 삶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신다.”고 말했다. 교종이 전한 해방에 대한 갈망은 일차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갈망을 교회가 끌어안아야 한다는 뜻이다. 아울러 교회 역시 해방되어야 한다. 교회가 세속화되어 자본주의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교회가 상업화되고, 성직자들은 관료화되었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교종은 이런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가톨릭교회가 지금보다 더 선교적이 되고, 좀 더 자비로우며, 변화 앞에 담대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종은 복음 안에서 세상과 교회를 혁명하라고 기대한다. 이것은 “가난한 이들과 평화를 위한 특별한 열정” 안에서 성취된다.

“안온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거리로 뛰쳐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더러워진 교회를 원한다.”고 말했던 교종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들이 줄곧 말해왔던 것처럼 “부자와 자본가들에게 저당 잡힌 교회를 다시 가난한 이들에게 돌려주려는 원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교회는 이제 야전병원처럼 교회 밖으로 나가서 세상의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고, 삶의 현장에서 그들과 연대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교회는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예수처럼 가난해질 용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 먼저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해방하는 교회가 되려면, 사실상 한국교회가 고백하고 있는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한 생각부터 다시 검토해야 한다. 강우일 주교는 <가톨릭교회는 왜 사회문제에 관여하는가?>라는 글에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이 세상과 무관하게 하늘 높은 곳에 좌정하고 계신 추상적인 신이 아니라 이 세상에 깊은 관심과 연민을 갖고 다가오시며 개입해 들어오시는 분”이라고 전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 세상과는 아무런 인연을 맺지 않고 초연하게 산야에 묻혀서 명상과 기도와 영신적인 수련에만 몰두하신 분이 아니”며,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30여 년을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사시면서, 그 시대의 세상이 차별하고 억압하고 외면하였던 보잘것없는 이들의 고통과 슬픔을 온몸으로 느끼시고,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시며,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신 분”이라고 소개한다.

해방신학에 관하여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1984년과 1986년 두 차례에 걸쳐 해방신학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여기서는 해방신학이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가운데 계급투쟁으로 나아가거나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을 취하는데 신중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해방과 자유를 향한 해방신학자들의 노력은 복음서와 교부들의 전통에 충실한 것이며, 특별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을 인정했다. “해방신학이라는 표현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의 희생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지칭하는 것”(자유의 전갈, 3항)이기에 온당하다는 것이다.

예수는 탐욕과 불의와 죄악으로 얼룩지고 억압이 가득한 세상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침묵하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권력자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런 점에서 그가 사제이든 수도자든 평신도든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이 사랑하신 이 세상에 포함된 불의와 고통, 슬픔과 연민, 다툼과 평화를 다 함께 끌어안는 것”이라고 강우일 주교는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산다는 뜻일 텐데, 예수님의 사랑은 교리를 넘어서는 실천적 사랑이었다. 야고보 사도는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야고 2,26)이라면서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다”(2,18)고 말했다.

교황청 신앙교리성에서 1986년에 발표한 <자유의 자각-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에서는 교회의 해방 사명에 관해 명료하게 말한다.

“억압을 당하고 자유를 갈망하는 이 시대의 인간의 고뇌에 응답하고자 하는 교회의 결의는 확고하다.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운영은 교회의 직접적인 사명은 아니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는 양심을 밝혀줄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을 교회에 맡기셨다. 교회의 생명인 하느님의 사랑이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진정한 연대를 이루라고 교회를 재촉한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이러한 사명에 충실 할 때에, 자유의 근원이신 성령께서 그들 안에 머무르실 것이고, 그들은 자기 가정에서 그리고 자기가 일하고 살아가는 모든 현장에서 정의와 평화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61항)

이 문서는 ‘해방신학’에 대한 교황청의 입장을 표명한 것인데, 해방을 위한 교회 사명을 실천하는 행동지침도 제시하고 있다. 교황청에서는 조직적인 폭력을 통한 해방운동은 단죄한다. 폭력을 통한 해방운동은 새로운 형태의 예속을 낳는 파괴적인 ‘환상’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유한 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행사하는 폭력”과 “경찰의 전횡적 행동”, 그리고 “통치체제에서 자행되는 온갖 형태의 폭력”을 단죄한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시국기도회’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이 시국기도회를 한편에선 ‘정치사제들에 의한 정치개입’이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미사가 기도의 최고형태라는 점에서, 시국기도회는 불의한 정권에 교회가 저항하는 비폭력적이며 복음적인 방식이다. 교회는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가난한 이를 선택하고, 하느님의 자비와 연민을 통해 사랑의 실천을 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한국교회는 무력한 이들이 고난 받는 현장 곳곳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의 말마따나 “공동선을 위한 정치적 사랑은 자선의 최고형태”임을 확인하고 있다.


뜻밖의 소식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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