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이야기-9]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비유

어느 아이가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내일이 언제야?” 엄마는 답한다. “하루 밤 자면 내일이야.” 다음 날이 되자 아이가 다시 묻는다. “엄마, 오늘이 내일이야?” 엄마는 답한다. “아니, 하루 밤 자면 내일이라니까.” 몇 번이나 같은 질문에 시달리던 엄마는 어리석은 질문에 종지부를 찍으려 한다. “하루 밤 자면 내일이 온다는 말을 도대체 몇 번이나 해야 하니? 너 바보니?” 그러자 아이는 단념한 듯 말한다. “엄마, 우리에게 내일은 없는 거야?” 예수의 비유 중 하나인 ‘어리석은 다섯 처녀’(마태 25,1-13)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도 같은 맥락이다.

결혼은 이스라엘에서 다른 어떤 인간사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결혼의 전체 과정이 이루어지는 데만도 일 년씩이나 걸렸으니 능히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사실 과거에는 어느 나라에서건 결혼이란 대체로 당사자가 아니라 부모의 문제였다. 고대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어서, 간혹 돈으로 신부를 사거나 성관계를 빌미로 여자를 얻는 경우가 있었으나(<미슈나>, 나쉼, 7), 일반적인 관행은 신부의 아버지와 신랑 될 사람 사이의 결혼 계약에 의존했다. 신랑이 결혼기탁금을 내고 아버지로부터 딸의 지배권을 넘겨받는 형식이다. 여성에 대한 지배권을 옮기는 것이 결혼이라는 관행은 요즘 시각에선 당혹스런 느낌을 줄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여성은 보통 12-13세에 결혼을 했다. 여성은 12세까지는 소녀, 12세에서 6개월 동안은 처녀, 그 이후로는 성인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니까 처녀 기간인 6개월 동안 우선 정혼을 하고, 그 후로 일 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정식 결혼이 이루어졌다. 정혼과 결혼 사이의 일 년 동안 정혼한 처녀는 조신하게 집안일을 익혀야 했다.

▲ <어리석은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 에드워드 번 존스, 1859.

정혼 후 일 년이 지나 때가 되면 드디어 신랑 될 사람이 신부 집으로 찾아오고, 신부의 친구들이 신랑을 마중 나간다. 이를 두고 혹여 정혼자가 신부 집으로 오는 길을 놓칠까봐 친구들이 출동한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신랑에 대한 예의를 표시하는 의례적인 마중으로 간주하는 게 좋을 듯하다. 예수는 그 날 벌어진 일을 이야기해준다. 아마 청중들은 귀가 쫑긋했을 것이다. 세상에 결혼이야기처럼 재미있는 게 어디 있는가 말이다. 보통의 경우 신랑은 낮에 신부 집을 찾는데 여기서는 예외적으로 밤에 찾아오는 것으로 묘사한다. 신부의 친구 처녀들이 기름을 준비해야 할 필요성에 맞추어 예외적인 경우로 상정한 것으로 보인다.

신랑이 도착하면 신부 집에서는 그날을 위해 오래 동안 준비해 두었던 결혼 잔치를 연다. 잔치는 보통 1주일 정도 열리는데 그 때문에 신부 집안 재산이 상당히 축났다고 한다. 여섯 독이나 담아 두었던 술이 다 떨어져 낭패를 볼 뻔했던 가나의 혼인잔치(요한 2,1-12)를 떠올리면 쉽게 상상이 간다. 또한 딸 셋이면 기둥뿌리가 뽑힌다는 한국 사람들의 너스레를 연상시키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처럼 결혼잔치가 성대하게 벌어졌던 까닭에 예로부터 이스라엘에서는 종말에 벌어질 ‘메시아 잔치’를 결혼잔치에 비하곤 했다. 성서에도 그런 흔적이 남아있는데 구체적으로 마태 22,1이 있다.

비유에서 신랑이 장차 올 메시아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메시아가 오면 성대한 잔치가 열릴 텐데 미리미리 잔치에 초대받을 자격을 갖춰두지 않으면 당연히 큰 낭패를 겪고 만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에는 두 가지 차원이 포함된다고 한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시작되었지만 그 궁극적인 완성은 종말의 날에 이루어지리라는 것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지금 여기서 이루어야 할 하느님 나라의 당위성과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종말에 거는 희망이라 하겠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not yet)’ 이라는 부사 형태의 용어로 개념화시키는데,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비유’가 갖는 시점은 우선 후자의 ‘아직’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섯 처녀의 한심한 처지에 절로 공감이 가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비유에서 가장 절묘한 부분은 신랑의 올 시간, 즉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태 25,13)라고 한 부분에 있다.

다섯은 기름을 준비했고 다른 다섯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두지 못한 기름 덕분에 잔치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니 지금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유에서 강조하는 중요한 때는 신랑이 오게 될 그 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다. 예수는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서 전체를 정리한다.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1-13)

오늘이 내일을 결정한다. 그리스도인에게 내일은 없는 것이다.


박태식 신부
/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 사는 세상’ 지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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