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5일자 1012호 <평화신문>과 2641호 <가톨릭신문>

누구에게나 생일이 있듯이 신문에게도 생일이 있다. ‘신문의 날’은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인〈독립신문〉창간기념일인 4월 7일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가 제정한 기념일이다. 민족이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 시대의 선각자들이 놓치지 않은 것은 언론의 중요성과 함께 언론을 통한 민중의 계몽이었다. 묘하게도 이때쯤이면 한국교회의 대표적 교계신문인 <가톨릭신문>의 창간기념일(4월 1일)도 함께 자리하고 있어 그 의미는 더 크다 할 수 있다. 생일상 앞에서 오늘의 신문을 톺아보자.

요즘 시중의 수많은 일간지를 대하면서 가장 염려스러운 점의 하나는 ‘뉴스거리’에 대한 선택이 노골적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편집권 독립'을 방패삼아 보도하고 싶은 것만 보도하는 경향이 이제는 거의 회복불능 단계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기자 혹은 데스크의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슈들을 있는 대로 전하고 독자들이 다양하게 판단하는 시대는 이제 물 건너 간 것이며, 그저 독자들은 신문사가 읽어주는 대로 들을 수밖에 없어 놓치는 뉴스의 공백이 무척 크다는데 있다 할 것이다.

교계신문도 예외는 아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두 교계신문이 진보냐 보수냐로 구분할 수 없는 ‘닮은 꼴’이기에 헷갈림은 없지만 그렇기에 우려하는 바는 두 배가 될 수밖에 없다. 지난 주 이 꼭지에서 <평화신문>이 전한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의 주상용 서울지방경찰청장 면담소식을 말한 바 있다. 공교롭게 이번 주는 두 신문 모두 정추기경이 강희락 경찰청장 면담 내용을 다시 전하고 있다. 이른바 2주 연속 폴리스 스토리다. 명동성당 들머리에는 선종하신 김수환추기경의 사진을 오래도록 전시했다. 전시사진은 그가 생전에 만났던 사람들이 핵심이었다. 그곳에는 요한바오로2세 혹은 마더데레사도 있었지만 탄광촌이나 철거지역과 출소자들의 재활공동체 방문 사진이었다.

멀리 갈 것 없이 2009년만 하더라도 교계신문은 정추기경의 동정을 어떻게 보도했다고 생각하는가? 사목행위가 아닌 외부인을 만나는 동정을 <평화신문>과 <가톨릭신문>은 통상 ‘사람들’ 꼭지에 소개하고 있다. 서울대교구장을 맡고 있는 정 추기경의 경우 당연히 <평화신문>의 보도빈도가 높다. 그렇지만 그곳에 비친 정 추기경의 만남소식은 명동성당 들머리용에 어울리는 것은 하나도 없다. 신자국회의원 접견(1월 25일), 법조인 만남(2월 8일), 국무총리 및 보건복지부장관 면담(2월 15일). 종교지도자 및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초청(3월 22일), 서울경찰청장 면담(3월 29일), 경찰청장 면담(4월 5일). 뭐가 문제인지 아시겠는가? 추기경의 동정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동정보도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그러나 무엇보다 편향적 보도의 대표적인 점은 운동권(?) 성직자들에 이르러서는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교계신문들은 그들에 대해 불가촉 인물이라는 시각을 넘어 아예 천주교회 사람들이 아니라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교계신문의 외면 속에 두 명의 천주교 신부와 한 명의 불교 스님이 땅 바닥을 기어가면서 기도를 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반도의 허리에 위치한 계룡산에서 오체투지라는 제목을 걸었지만 그것은 땅바닥을 지렁이처럼 기어가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것은 시위가 아니며, 그것은 기도의 시간이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본질적인 것을 향해 시선을 안으로 거두는 시간”(이주향 교수/ 수원대)인 것이다. 종교인은 종교행위를 몸으로 행할 때 그의 존재가치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 종교행위가 성당에 갇힌 것이 아니라 그가 모시는 무소불위의 하느님이 계시는 세상 속에 행함을, 그것도 온 몸을 던져 행함을 언론이 보지 못한다면 누가 볼 것인가? 신문의 날에 나는 부끄럽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김유철/지금여기 편집위원, 경남민언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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