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주일 복음 묵상

ⓒNabeel Syed
 

8월 2일 / 연중 제18주일 (요한 6,24-35)

하느님의 일


저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꼬맹이 조카가 두 명 있습니다. 처음엔 몰랐는데 이 녀석들이 말문이 트이면서 점점 요구하는 게 많아집니다. 그 요구는 대충 둘러 댈 만큼 두루뭉술하지 않고, 대단히 실질적이며 구체적입니다. “삼촌 나 또봇 보여줘.”, “삼촌 이제 뽀로로는 그만.”, “삼촌 나 파워레인져 사 주세요.”

누구 하나 제대로 가르쳐 준 적 없는 것 같은데 이 꼬맹이 조카 녀석들은 어떻게 정확한 만화의 제목과 상품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비 그 자체입니다. 제가 한 번은 “파워레인져 말고 저기 있는 그냥 장난감은 안 돼?”라고 물으니 단호하게 안 된답니다. 꼭 파워레인져이어야만 한답니다. 예전엔 “만화 보자.”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해도 “네~” 했던 녀석들, 무엇을 손에 쥐어 줘도 신나게 놀던 녀석들이 상품의 이름을 알고 가치를 알게 된 후부터는 장난감은 가지고 노는 것에서 꼭 이것이어야만 하는 것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행적과 활동 그리고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잘 따르겠다는 이유로 자신만의 방식 만들어 내고 그것을 고수하기 시작합니다. 고착화된 자기만의 방식이 판단 기준이 되고, 이 기준이 하느님의 일을 잘 하는 사람과 잘 못하는 사람으로 서로를 갈라놓습니다. 가지고 노는 것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즐겁게 가지고 놀면 그것이 좋은 장난감입니다. 하느님은 잘 놀기를 바라시는데, 장난감을 잘 만드는 게 하느님의 일이라고 착각 할 수 있습니다. 이미 파워레인저 아니면 쳐다보지 않는 제 조카들에게 저는 다른 것으로 신나게 놀 수 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깊게 생각해 볼 오늘입니다.
 

8월 9일 / 연중 제19주일 (요한 6,41-51)

영웅


살면서 많은 영화를 봤습니다. 그 영화들 중에 재미있는 영화와 의미 있는 영화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다면 재미도 있으면서 의미까지 있는 영화일 것입니다. 유기서원자 시절에는 재미로만 봤던 영화가 종신서원자가 되어서는 의미 있게 다가와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홍콩의 액션스타 이연걸이 주연을 했고, 그 밖의 유명한 배우들이 총출동하여 화제가 된 영화가 있었죠. <영웅>입니다. 네 가지 색으로 캐릭터들을 표현하고, 화려한 액션으로 관람객들의 눈을 사로잡은 명작입니다. 영화의 간략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중국의 춘추 전국 시대, 당대의 폭군 진나라의 왕을 살해하기 위해서 주인공은 왕 앞에까지 가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었는데요. 왕을 위협했던 무림의 고수들을 차례대로 무찌르고 이에 해당하는 징표를 가지고 와야 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무술 실력을 자랑했던 주인공은 차례대로 무림의 고수를 꺾고 결국 왕 3보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왕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주인공은 왕을 살해하는 것보다 왕의 필요성을 크게 깨닫게 됩니다. 결국 주인공은 자신의 뜻을 거두고 마당으로 나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되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주인공의 깨달음이 영화의 핵심이지만 그것을 여기서 설명하진 않겠습니다.

주인공의 깨달음과 함께 저도 깨달은 게 있으니 바로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향하는 저의 태도였습니다. 영화 안에서 왕은 분명 누가 보더라도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왕의 이야기를 듣고 칼을 거두어들이지요. “누가 보더라도”라는 표현은 누군가의 말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을 “그럴 것 같다.”라는 이유로 믿는 것, 진솔한 대화나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 없이 보이는 것만으로 믿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안에 많은 위험과 어리석음이 감춰져 있는 것을 모르는 채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하실지 전혀 감도 잡고 있지 못합니다. 군중은 예수님께 다가가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았을 것입니다. 새로 알아가는 것보다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 직접 알아보는 수고로움 보다는 누군가를 통해서 듣는 편이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 그런 군중들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람됨을, 그 마음을,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있었을까요? 이제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8월 16일 / 연중 제20주일 (요한 6,51-58)

생명의 빵


평소에 TV를 잘 안 보는데 우연히 <1박2일>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패널들이 한국의 유명한 쉐프들과 함께 팔도를 돌아다니며 특산물을 가져와 음식 대결을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음식은 쉐프들과 패널들이 만들었고, 심사는 행사장에 모인 일반 시민들이었습니다. 짝을 이룬 팀들은 15분 동안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고, 서로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음식을 만들어 경연에 임했습니다. 각기 전공한 분야가 다르니 사회자가 모두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음식을 준비하셨지요?” 그중에 이연복 쉐프는 고급 재료를 가지고 마파두부밥을 많이 만들 계획이라고 답했습니다. 사회자는 시중에서도 쉽게 먹을 수 있는 것을 왜 굳이 이 고급 재료로 만드냐고 재차 물으니 이 쉐프는 가장 대중적인 것, 가장 익숙한 맛이 일반 시민의 입맛을 사로잡을 것을 확신한다고 답했습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제 머릿속의 1등은 이연복 쉐프였습니다. 산해진미가 나온다 해도 어머니의 집밥을 이길 수 없고, 유럽 여행 중 가장 맛난 음식을 먹는다 해도 김치에 된장찌개가 가장 맛있는 법이니까요. 요리와 심사가 끝난 그날의 우승은 제 예상대로 이연복 쉐프의 마파두부밥이었습니다.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익숙하다는 것은 그만큼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오래 함께 있었고, 자주 함께 있었다는 것이죠. 예수님 시대에 가장 익숙한 것 가장 흔히 볼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전 세계에서 이 단어 하나만 알면 굶어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 세계 공통어, 시대가 변해도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음식.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생명의 빵, 영원한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음을 알리는 빵, 그리고 언제 어디서든 너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시는 빵, 시대가 변해도 언제나 곁에 있겠다고 다짐하시는 빵으로 하늘에 고독하게 계셨던 당신은 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 곁에 익숙한 빵은 이미 준비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빵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고만 합니다. 우리의 방식을 잠시 내려놓고 기도하는 삶, 묵상하는 삶, 머물러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시작해 보십시오. 그런 태도가 익숙해지고, 기도가 익숙해지고, 신앙이 익숙해 질 때, 우리는 제과점 빵이 아닌 영원한 빵, 생명의 빵을 먹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8월 23일 / 연중 제21주일 (요한 6,60-69)

도전


저는 피정의 집에서 삽니다. 주말이면 늘 찾아오는 피정객들과 피정 동반을 하지요. 가끔 세례명이 없는 이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오시게 되었는지를 묻습니다. 대부분이 ‘착하게 살고 싶어서’ 또는 ‘성당의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성당을 찾게 되었답니다. 그러면 성당에 어떤 분위기가 가장 매력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포근하게 안아주는 느낌’, ‘위로 받는 느낌’이 대부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가톨릭의 가장 큰 위로는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누는 따뜻한 정과 위로입니다. 그런데 가끔 피정의 집으로 면담을 청해서 오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하나같이 공동체 안에서의 불만, 이유를 알 수 없이 벌어지는 일에 대한 분노, 하느님에 대한 원망이 대부분입니다. 내가 선택해서 믿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예수님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불평과 원망이 쉽게 나오나 봅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 중에 좋은 말만 마음속에 담아 두고선 자신이 어려움에 처할 때 장난감 상자에서 장난감을 꺼내듯 한 번 꺼내 보고 다시 집어넣는 것을 반복해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저희 선배 수사님께서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앙은 위로와 도전이 함께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아무리 좋은 말씀을 주셨다고 해도 현실에 빗대어 볼 때면 말도 안 되는 어려움 일 수 있습니다. 가령 “원수를 사랑하라.”라든지 혹은 “한쪽 뺨을 맞았을 때 다른 뺨을 대라.”라는 등. 이런 말을 믿고 실행하라고 가르치시지만 나를 괴롭히는 직장상사에게 뺨을 대줄 수는 없습니다. 매일 미워 보이는 옆집 철수, 영희 엄마를 사랑하기는 정말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때부터 내가 믿고 있는 종교와 신앙은 위로만 건네주는 달콤하고 맛있는 케이크가 아니라 힘들게 반죽을 해야 하고 어렵게 장식을 해야 하는 부담스런 일, 즉 어려운 도전이 되기 시작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언제나 늘 위로만 바랐다면 예수님을 향해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로와 도전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히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실 때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8월 30일 / 연중 제22주일 (마르 7,1-8.14-15.21-23)

완덕오계


수도원에 입회한 이후 어제까지 아니 오늘 아침까지 매일 기도 후에 하는 우리의 다짐들이 있습니다. 수도회 창설자 신부님께서 저희에게 물려주신 유산인데요, 완전한 덕에 이르는 다섯 가지 방법, 즉 ‘완덕오계’입니다. 완덕오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분심 잡념을 물리치고, (2) 사욕을 억제하고, (3) 용모에 명랑과 평화와 미소를 띠우고 언사에 불만과 감정을 발하지 말고 태도에 단정하고 예모답고 자연스럽게 하고, (4) 양심불을 밝히고, (5) 자유를 천주께 바치고 그 성의를 따를 지니라.” 입회 후에는 형들이 하니까 의미 없이 되뇌던 다짐이었는데 해를 거듭하고 어느새 형의 위치에 서다 보니 안과 밖, 마음과 행동에 대한 균형 잡힌 가르침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완덕으로 가는 길은 한쪽으로 치우친 깨달음이 아니라 보여 지는 것과, 간직하고 있는 것이 하나로 완성되어 가는 길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식에 치우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런데 이 꾸짖음은 ‘모’ 아니면 ‘도’가 되는 흑백 논리의 꾸짖음이 아닙니다. 보이는 형식을 잘 간직하고 그에 따른 의미를 잘 간직하는 것입니다. 즉 겉과 속이 하나로 완성되기를 바라는 꾸짖음인 것입니다. 형식만을 따르면 형식주의자가 되고 의미만을 따르면 아웃사이더가 됩니다. 안과 밖, 형식과 의미가 조화를 이룰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을 올바로 따르는 길이 지금 여기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이영준 신부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한국남자수도회 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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