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루시-스미스 신부, <가톨릭 헤럴드>)

올 10월에 열리는 가정에 관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에 관해 엄청난 양의 토론이 있었다. 그래서 여기에 뭔가 더 덧붙이기에는 약간 죄짓는 기분도 든다. 하지만 이번 시노드는 그간에 있었던 모든 시노드와 다른 한 가지가 있다. 시노드에서는 우리 대부분에게 아주 중요한 교리 문제(혼인의 불가해소성)을 다루지만, 이번 시노드의 중요성은 이것 이상이다.

이번 시노드는 인터넷 시대에 열리는 첫 시노드다.

옛날 옛적에는, 신앙과 교리에 관한 결정들은 아주 제한된 수의 사람들이 내렸다.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 때는 수십 명의 주교들만 참석한 가운데 대부분의 회의를 진행했다. 트리엔트공의회와 제1차 바티칸공의회(1869-70) 사이에 살던 사람들은, 교황과 그의 추기경들이 교회를 통치한다는 인상을 갖고 있었는데, 이들은 당연히 이탈리아인 교황이고 손가락으로 꼽을 숫자의 이탈리아인 추기경들이었으며, 그들은 로마를 떠나본 적이 없었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이런 범위를 벗어난 국제적 공의회였지만 진정으로 교회가 세계적으로 처음 모인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로서, 여기에서는 미국, 프랑스, 벨기에, 그리고 독일인들이 영향력이 컸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많은 내부 다툼이 있었고,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많은 무대 연출이 있었지만, 두 공의회에 대한 전반적 느낌은 둘 다 강력히 일치된 교회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난해의 임시총회 시노드는 잘못된 무대연출의 장관을 보여 줬다. 중간보고서의 발표와 잇따라 일어난 반동적인 수색작업을 보면서 우리의 불신을 유보하기는 너무나 불가능했다. 그 기분 안 좋은 순간에 우리는 시노드가 진행되는 내부를 볼 수 있었고, 그 모습은 깔끔하지 않았다.

▲ 시노드홀에 모인 추기경들.(사진 출처 = <가톨릭 헤럴드>)

하지만 시노드의 파장 안에서 뿐 아니라 그 밖에서도, 시노드 진행은 통제의 끈을 벗어난 것으로 보였다. 추기경들이 다른 추기경들과 날카롭게 맞서고, 주교회의들과 주교회의들이 서로 의견이 다르며, 어떤 고위성직자는 자신의 사제들과 의견이 달랐다. 게다가, 이번 시노드 이전까지는 시노드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인터넷이 그 발언대가 되었다.

이 사실은 어떤 이들에게는 재난처럼 충격이겠지만, 또한 긍정적 측면도 있다.

불일치를 보면서, 그것이 사실 그대로라면, 우리는 성공회가 1994년에 여성사제를 서품하기로 결정하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보여 준 모습을 떠올린다. 어떤 이들은 1980년대에 영국 노동당의 전당대회들이 강경파들에 의해 시달리며 재앙을 맞다가 분열돼 사회민주당이 떨어져 나간 일이 생각나기도 할 것이다.

위에 든 두 사실은 둘 다 기분 좋은 비교사항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을 생각해 보라. 이전의 그 어떤 시노드보다 이번 시노드에 많은 사람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전에도 시노드가 많았다. (나는 마지막 지난 번 시노드가 뭐에 관한 것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는 앞으로는 시노드가 절대 다시는 밀실 안에서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신학은 초대받은 이들만 따로 모여서 얘기해야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어디서든 나는 모든 공동체들에서 공동체 수준에서 신학토론을 하는 아프리카식 영감을 담은 “정자나무 신학”에 대해 써 왔다. 이 신학은 잘 교육받고 충분한 정보를 갖춘 평신도들이 있어야 제대로 열매를 맺는데, 이러한 평신도는 (19세기에) 뉴먼 추기경이 꿈꾸었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희망하던 모습이다.

결국, 우리가 되돌아오고 또 되돌아오곤 하는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다. 우리 모두는 그 영향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참여하는 평신도를 명확히 원했고, 또한 참여하는 성직자를 원했다. 그런데, 이번 시노드에서, 우리는 그간 우리가 원하던 것을, 많은 이들이 생각하던 그런 방식과는 제법 차이가 나지만, 결국에는 이뤄냈다. 그리고 내 보기에는, 여기에서 우리는 또한 공의회 이후 현재 교회의 핵심적 결함을 짚어 낼 수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평신도의 (그리고 성직자들의) 의견을 듣는 일에 대해 말했지만, 그래 놓고서는 막상 이러한 협의를 어떻게 어떤 구조로 할 것인지는 내놓지 못했다. 공의회는 모든 이가 자신들의 사목자와 만날 통로가 있어야 하고 자신의 의견을 알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관점을 알릴 수 있으려면 교계제도는 이러한 관점을 기꺼이 들으려는 자세를 보여야 하는 것이다.

이번 시노드는 이런 점에 크게 못미치는 협의 절차를 드러낸다. 그리고 협의에 따라오는 여러 과제들도 드러낸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을 믿는다면, 당연히 (대표) 선정에도 주의해야만 한다. 우리는 하느님 백성 모두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답을 줄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하는 이들의 얘기만 들어서는 안 된다.

이번 시노드의 열매들은, 아마 좋은 결과들이겠지만, (교회법상 혼인무효 없이 국법상 이혼자와 재혼자를 더 관대히 대우하자는) 카스퍼 추기경의 제안이 잊힌 한참 뒤에도 우리와 함께 하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새 길이 시작되는 그 자리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 길은 어떤 이들이 말하기 좋아하듯 “교회 되기”(being Church)의 새 길이다. 비록 어떤 이들이 상상하던 그런 길을 지나 이 자리에 온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체스터턴이 말했을 것처럼, 아직까지 한번도 입을 연 적이 없던 사람들이.

기사 원문: http://www.catholicherald.co.uk/commentandblogs/2015/06/29/synods-are-now-for-the-many-not-just-the-privileged-f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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