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언론] 3월 22일자 1011호 <평화신문>과 2640호 <가톨릭신문>

‘자비 없음’과 ‘무자비’란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어감은 다른 것이다. ‘예비자’와 ‘예비신자’가 다르고, ‘이교인’과 ‘비그리스도인’이 같으면서도 다른 것은 역시 그 언어들이 가지고 있는 무게와 담겨진 의미 때문일 것이다. 아담이 하느님의 숨결로부터 만들어지던 태초까지 올라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히브리사람들에게서 수천 년을 내려오는 유대교와 함께 예수로부터 파생된 그리스도교이다. 그러기에 그 안에는 다양한 해석과 다양한 용도의 신앙언어가 그리스도인의 생활 곳곳에 배여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현대의 교회와 교계신문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에 대한 이해는 신학자들의 몫이며, 본당을 중심으로 교회생활을 하는 천주교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평화신문> 1011호 1면의 박스기사에는 흐뭇하면서도 사람에 따라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기사가 실렸다. 기사의 요점은 이러하다. 수원교구의 한 본당이 12년 전에 본당신축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신축기금 약정을 하였으나 어려운 집안형편으로 본당에 납부하지 못한 한 교인이 이제라도 그 부담을 덜고자, -하느님과 한 약속을 지키고자- 100만원을 본당 사무실에 편지와 함께 두고 갔다는 기사였다. 신문은 그 기사의 제목을 ‘12년 만에 지킨 하느님과 약속’이라고 뽑았다. 1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본당에 책정하였던 약속을 잊지 못한 교인의 겸손한 마음이고 소박한 신앙심에서 비롯된 의지였을 것이다. 또한 그 제목을 뽑은 편집부 기자 역시 그런 의미로 하였을 것이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교회의 장상들과 언론은 지역본당의 신축이나 개축 등과 관련하여 구성원들에게 어떤 언어가 동원되며, 때로는 터무니없는 용어가 난무하는지 아시는가? 아무리 좋은 것이 좋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교회에 적을 두고 있는 교인들의 숙명(?)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저런 말이 왜 여기서 나오나?”하는 반문이 생기는 것은 한 두 번이 아니다. 심지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것이 ‘하느님이 머무시는 집’이며 ‘하느님의 일’이고 ‘하느님과의 약속’이다. 감히 인간이 이름 지어 부를 수 없는 존재인 하느님은 교회건축을 위한 조연배우가 아니며(물론 주연은 본당신부일 때가 태반이다) 그 분의 말씀이 인간언어로 표현된 성경의 각 구절은 교회건축을 위한 배경자막은 더더욱 아니다.

<평화신문>의 기사에서 현재의 그 본당 주임신부가 그분에 대해 “사제로서 신자에게 짐을 지워준 것 같아 너무 미안하다”라고 말한 것은 핵심을 정확하게 본 것이며, 그렇게 말한 본당책임자의 마음이 아름다운 것이다. 본당을 운영하기 위한 기본요소인 교무금을 부인하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교인들의 공동체가 미사를 비롯한 예배의 장소, 친교의 장소로서 건물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더욱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적상 나와 있는 구성원들의 참여도가 현저히 떨어지기에 때로는 기술적(?)인 어휘구사의 필요성도 인정한다.

그러나 인용할 것을 인용해야 한다. 사람의 말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견강부회하여 이렇게 저렇게 사용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다. 하물며 그것을 교회의 이름으로 해서야 될 말인가? 교무금과 건축을 위한 납부가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말하는 신학자도 있으며, 이 근거로 레위기 27장, 역대 상 29장과 말라키 3장 등의 성경 구절을 들고 있으나, 이 성경은 그렇게 사용돼서는 안 될 말씀들이다. 그렇게 사용하고자 성경을 쓰고 외우고 읽으라고 했다면 그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교인’들의 행위인 것이다. 하기는 “하느님의 인내를 더 이상 시험하지 말라”고 아예 협박하는 한 본당의 유인물 앞에서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신앙언어를 제자리에, 교회언어를 자비롭게!

김유철/지금여기 편집위원, 경남민언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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