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수녀의 이콘응시]

 

En Cristo
인간의 육체가 얼마나 나약한가! 숨 한번 제대로 못 쉬면 이 세상과 영원히 이별이다. 숨은 곧 삶과 죽음이라는 선(線)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표시이다.

세례자 성 요한, 그리스, 15세기,
wijenburgh echteld 의 성, 네델란드

자 이콘을 바라보자!
세례자 요한이다. 그런데 날개가 달렸다.
세례자 요한이 천사였냐면 분명 아니다.
그의 부모는 신약 성경의 기록대로 사제인 아버지 즈가리야와 성모님의 친척인 엘리사벳이 그의 엄마이니 분명 천사는 아닌 예수님과의 동시대 사람이다. 굳이 구별한다면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리는 마지막 예언자이다.

이콘에서 세례자 성 요한은 지상에서의 천사와 천상의 사람으로서의 이미지로 그려지며 바로 메시아의 전달자 역할에서 천사 이미지가 부합된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즉, 광야의 천사라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잠시 이콘을 바라보면,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두루마리엔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귀절이 적혀 있다. 비교해보면 알 듯이 지난번 데에시스 중의 세례자 성 요한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이콘이다.

전신으로 그려진 이 이콘의 색감은 상당히 무겁게 느껴진다. 손질되지 않은 머리에 거친 털옷을 입은 그의 모습은 세속이 요구하는 기준과 관심엔 애초부터 거리가 먼 자의 모습이다. 그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이 세상에서의 녹녹지 않은 사명감처럼 얼굴의 표정에서 단호함이 묻어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지금 세례자 성(聖) 요한의 이콘을 바라보고 있으면 해야 할 그 무언가를 하지 않는 우리의 양심에 조용히 호소하는 듯하다. 외치는 이의 소리는 광야를 거쳐 세상에 반향하여 곳곳에서 수많은 소리로 우리에게 다가 온다. 다가오는 소리에 귀와 눈과 마음을 연다면 회개의 의미를 알 것이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맞이 할 수 있으리라.
‘아메리카의 벼룩’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엘 살바도르(EL SALVADOR). ‘벼룩’이라는 별명답게 하루면 나라 한 바퀴를 돌 수 있을 정도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으로 밀입국하는 사람들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던 2001년, 이 나라가 꼴론이라는 화폐에서 달러로 바뀌자 굳이 미국까지 갈 필요없이 가만히 있어도 미국 땅이 될 것이니 기다리면 된다는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벼룩의 간을 빼 먹는 미국의 속셈을 모르는 국민이 아니다.

미국의 꼭두각시였던 군부독재는 자국의 백성을 희생해서라도 얻고 싶은 권력 앞에서 장님이 된 그들을 향하여 눈을 뜨라고, 바른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아니 잘못된 길에서 발을 돌리라고 외치는 로메로 대주교에게 총구을 겨냥하였다.

정부는 그에게 말하지 말라고, 더 이상 외치지도 말라고, 목자의 지팡이를 양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중지하라고, 가난하고 불의에 죽어 가는 사람들을 그만 감싸안으라고, 정의로 불타는 그의 가슴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건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산 살바도르의 주교좌 성당내 지하 소성당엔 로메로 대주교의 시신이 묻힌 무덤이 있다. 그 당시만 하여도 참배 온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씨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라는 구절과 그의 얼굴이 함께 현수막에 새겨져 높직이 달려 있었다. 그곳은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읽으며 정의를 위해 순교한 로메로 대주교의 삶이 묻혀 있는 돌무덤에 손을 얹고 침묵 중에 그를 만날 수 있는 장소였다.

1980년 3월 24일 ‘아메리카의 벼룩’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매년 정의가 꿈틀거리는 곳에서는 꼭 그 날이 되새겨 졌다.
로메로 대주교의 서거일!
이날은 성당이나 거리의 곳곳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피부색과 언어, 나라가 달라도 같은 이념 아래서 같은 깃발을 흔들며 주고 받는 웃음 가득한 인사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그의 숨(呼吸)은 육체를 떠나 세상과 이별 하였지만 29주년을 맞이하는 오늘, “죽어서도 나는 민중들 속에 살아 있으리라”는 그의 말처럼 민족 안에서, 아니 정의를 부르짖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죽어가는 정의에 대한 열망이 숨쉬기를 계속하고 있다.

로메로 대주교는 자신과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정치인들, 부정부패에 젖은 이들,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이들, 약한 자를 외면하는 이들, 정의를 부르짖는 이들을 짓밟는 자들에게 세례자 성 요한처럼 이 시대의 예언자답게 두루마리를 펼치며 무서운 경고를 하고 있지 않을까!

“회개하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임종숙/ 루시아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원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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