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금방 오는 게 아니고 어둠의 긴 터널 같은 곳을 지나야 있다."

지난 11월 10일 9명의 미국평화활동가들과 함께 강정을 방문한 윌리엄 빅셀 신부(84)의 말이다. 빅셀 신부는 지난 2013년 9월 강정을 방문하고 큰 영감을 받아 9명의 평화활동을 하는 친구들과 함께 1년 만에 다시 강정을 찾았다.

“미국에서도 평화를 위한 미사를 하고 있고, 지금도 이를 위해 어딘가에서 하고 있겠지만, 이처럼 길거리에서 매일 미사가 행해지고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주민, 신부, 수녀, 주교까지 하나가 되어 성찬례가 중심이 되어 저항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가! 강정은 작지만 굉장한 ‘평화의 풀’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작은 마을에서 폭력에 저항하며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우리를 다시 이곳으로 오게 만들었다”

▲ 강정에서 경찰에게 들려 나오는 빅셀 신부.ⓒ오두희
빅셀 신부는 예수회 신부로 1959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마르틴 루터 킹의 인종차별 반대운동에 동참하기도 했지만, 베트남에서 미군이 저지른 밀라이 학살에 대한 보도를 접하고 본격적인 반전 평화운동을 하게 되었다. 비폭력 평화행동을 하는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센터와 '칼을 쳐서 보습을'(Plowshare Actinos )을 이끌어 왔고, 그 활동 때문에 3년의 징역과 6개월 동안 전자 발찌를 찬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다.

그는 50년이 넘게 왕성하게 평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이젠 나이가 들어 건강이 좋지 않다. 최근에는 녹내장 수술을 받아 시력이 많이 약해졌고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걸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강정에서 매일 같이 벌어지고 있는 ‘성찬례적 저항’을 체험하고, 함께 공감하며 서로에게 에너지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불편한 노구를 이끌고 온 것이다.

1년 만에 만난 빅셀 신부와 문정현 신부는 뜨겁게 서로를 포옹했다. 반평생을 무너진 정의와 평화를 되살리기 위해 긴 외로움을 견디며 현장을 지켜온 두 노사제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긴 포옹을 통해 마치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며 격려하는 것 같다. 현실에 머물지 않으며 끊임없이 통념에 거슬러온 노사제는 서로 너무도 닮았다.

“너무 힘이 없어 걷기에도 어려운데 기우뚱 거리면서도 지금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현장에서 투쟁하면서 살고 계신다. 저분의 길이 내가 가야하는 길이라고 재확인시켜 준다. 완전히 빈손으로 사시는 분 같다. 어찌 보면 노숙자같이 보이지만 행동할 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분이다. 아마도 긴 세월 단련된 행동에서 나온 것인데 정말 존경스럽다.”(문정현 신부)

문정현 신부는 빅셀 신부를 보며 존경을 표하면서도 “그 몸으로 먼 길을 어떻게 돌아가실지, 이번에 돌아가시면 다시 오시지는 못할 텐데”라며 안타까워했다.

빅셀 신부는 “그동안 강정이 많이 변했다”며 특히 해군기지 부근에 군 관사를 짓기 위해 감귤나무가 뽑히고, 비닐하우스가 철거된 땅을 보며 몹시 마음 아파했다.

그는 “땅은 사람을 풍족하게 하고 인간에게 건강한 기운을 주는 곳이다. 그런데 군 관사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해군기지가 마을 안으로 확장된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땅이 군사기지화 될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도 “그러나 이들의 힘이 큰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평화의 힘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며 군 관사 공사반대 천막농성장을 찾아 주민을 격려했다.

빅셀 신부는 지난해 강정을 방문한 뒤, <가톨릭일꾼> 신문, 블로그에 글을 쓰거나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 ‘제주(강정)을 찾아가자’는 작은 캠페인을 벌였다. 이런 호소에 20대에서 80세까지, 장애인권운동가이면서 영상감독, 대학생, 승려, 트라우마에 관한 전문의사, 영성과 비폭력대화 상담교육활동가, 반핵반전운동을 하고 있는 가톨릭일꾼 회원, 베트남에 참전했던 평화재향군인회, 간호사 등 각 부문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전문가들이 응답했다. 이들은 대부분 미국의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40년이 넘도록 평화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강정에 오는 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7시 공사장 정문에서 진행되는 평화 100배와 11시 생명평화미사에 참석했다. 오후에는 4.3평화공원, 알뜨르 비행장 등 제주의 역사 탐방을 하거나, 마을의 신성한 장소들과 당에 둘러 보기도하고, 강정 평화활동가들과 주제별 소모임 나눔을 갖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며, 서로에게 용기와 힘을 줬다.

▲ 문정현 신부(왼쪽)와 빅셀 신부.ⓒ방은미

이들은 미사에 참여하면서, 단지 공사차량을 막기 위한 행위가 아닌, 강정의 평화를 간절히 염원하는 강정공동체 일원들과 하나 되기 위한 마음으로 미사에 참석했다. 또 이들의 몸에 배인 강인하면서도 유쾌하고, 검소하고 순수한 모습은 강정 평화지킴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적 리더인 빅셀 신부의 영향도 있겠지만 평화활동의 기반이 행동(실천)과 기도(묵상), 스스로 선택한 ‘자발적 가난’으로 인한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풍겨져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성찬례를 통해 애달프게 갈구하는 문정현 신부의 평화의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서로를 돌보고 대하는 모습에서, 공동체가 함께 모이고 식사를 같이하고, 유머와 저항을 표현하는 방식들, 그 예술 안에서, 그리고 즐거운 춤사위에서. 후손들의 미래를 내다보고 자녀들을 돌보는 모습에서 그 끈기를 보게 된다”(정신과 의사 소냐)

팔레스타인과 같은 세계 분쟁지역을 돌아다니며 트라우마와 회복 탄력성에 관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정신과의사 소냐는 “먼 길을 왔음에도 불구하고 꼭 집에 있는 것 같이 편안하다. 그것은 모두 관계의 힘인 것 같다”면서, “많은 분쟁지역을 다녀 봤지만 이곳은 독특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강정에는 부당한 국가 공권력의 폭력에 의해 해군기지가 들어서 이제 눈으로도 기지의 모습이 확연히 보이는 상황이다. 매일 분노를 삭이며, 때로는 절망감에 빠지고, 패배하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심하며 무력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하지만 먼 길 마다하고 타국에서, 혹은 육지에서 귀중한 시간을 내어 온 사람들을 통해 평화를 지키기 위한 활동의 의미를 찾는다. 진실된 사람들의 진심어린 공감과 연대가 우리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는데 이것이 바로 평화의 위대한 힘일 것이다.

‘강정아 너는 비록 이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지만 너에게서 온 나라의 평화의 시작되리라’라는 강우일 주교의 선언처럼 강정은 평화의 마을이 되어 가고 있다.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만나 성찰하고 그를 통해 서로 힘을 얻고 자기 현장으로 돌아가 투신할 힘을 얻는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평화의 성지가 아닐까. 성지란 기적이 일어나는 곳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며 삶의 자양분을 얻는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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