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로 가는 길의 마지막 종착지인 santigo de compostela 성당의 모습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순례자'와 여행작가 김남희씨의 체험기로 잘 알려진 산티아고로 가는 길(Camino de Santiago)이 우리나라 배낭여행객들의 성지처럼 떠오르고 있다. 스페인 땅을 가로지는 이 길의 최종 목적지는 예수의 형제로 알려진 성 야고보의 무덤(santigo de compostela)이 있다고 알려진 곳으로 많은 이들이 약 한달여 정도(프랑스 국경에서 출발했을 경우, 약 800Km)를 걸으면서 자기 성찰과 영적 체험을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파울로 코엘료는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거창한 것이 아닌 자신을 천천히 돌아보는 여행이며 걸을 수 있다면 지금 당장 배낭을 꾸려 그 길에 서보라고 권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헛된 욕망과 분노에서 벗어나 좀 더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코엘료의 말대로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목표를 상실한 현대인들에게 영감을 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성찰뿐 아니라 이 길 위에서 죽은 희생자도 기억해야

그러나 이 길의 역사를 제대로 되새기면 자신에 대한 성찰뿐 아니라 그 길위에서 희생당한 사람들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9세기초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스 2세가 야고보의 묘에 성당을 세우고, 야고보를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봉한 이후 부터이다. (스페인 식민지에 '산티아고' 또는 '샌디에고' 라는 도시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야고보의 묘가 발견되고 성당이 세워졌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성지순례에 나서게 되는데, 이는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레콩키스타(국토수복운동)와 연결된다. 1189년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스페인의 기독교왕국을 지원하기 위해 야고보의 묘를 로마, 예루살렘에 이어 성지로 선포하고 산티아고로 가는 길을 걷는 사람의 죄를 감해준다는 칙령을 발표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 몰려들었다.

그들 중 일부는 스페인 군대와 연합하거나 입대해 이슬람 세력과 싸웠고, 결과적으로 기독교세력의 영토는 크게 확장되었다.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예루살렘 수복을 명분으로 시작했던 십자군 전쟁과 같은 맥락으로 진행된 것이다. 이후 수세기에 걸친 공방 끝에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스페인 연합왕국이 1492년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점령지 그라나다를 정복하면서 레콩키스타는 마무리 짓게 되었다.

결국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스페인의 국토수복운동에 큰 기여했지만, 문제는 기독교국가로 통일시키는 과정에서 큰 비극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콜럼버스의 미대륙 발견을 지원한 것으로 유명한 이사벨라 여왕은 스페인을 철저한 로마 가톨릭 국가로 만들기 위해 인종청소에 가까울 정도로 이슬람교도와 유대교신자를 축출했다.

이사벨 여왕의 이단 척결과 알함브라 칙령

이슬람 통치시절에는 비록 차별은 있었지만 경전과 성지(聖地)의 백성이라는 의미에서 세금만 내면 기독교와 유대교 신앙을 허용했던 것과 정반대의 길을 걸은 것이다. 그녀는 이단을 척결한다는 명분하에 1478년 설치된 종교재판소를 확대, 강화해 개종을 거부하는 이교도와 반체제인사를 이단으로 몰아 화형에 처하거나 재산을 몰수해 국외로 추방했다. 이를 알함브라 칙령(Alhambra Decree)이라고 부른다.

당시 스페인의 종교재판소는 국왕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유럽의 어떤 종교재판소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재판은 피고에게 유리한 변호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허용되지 않고 오로지 불리한 증언만 허용되었다. 또 밀고는 비록 부모, 형제, 자매관계일지라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스페인의 종교재판 광경

고문방법도 다양하고 악랄했기 때문에 용의자는 허위자백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이단으로 몰린 사람들은 대부분 화형에 처해졌다. 또 이단은 아니더라도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국외로 추방했는데 이때 쫒겨난 인원이 무려 24만여명에 달했고 이들은 네덜란드나 네덜란드, 이탈리아, 불가리아, 그리스 등으로 흩어졌다.

이 당시 유대인 추방은 이교도를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진행되었지만 실은 국토수복운동에서 공을 세운 왕족이나 귀족들에게 토지와 재산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였다. 유대인 추방은 단기적으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스페인 발전에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높은 학문적 수준과 자본, 상업기술을 보유했던 유대인들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사회, 경제의 중추가 무너진 것이다. 대신 이들을 받아들였던 네덜란드는 영국이 등장하기 전까지 2세기 이상 경제적 번영을 구가했다. 이와 함께 산티아고로 가는 길도 그 목적을 다했는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면서 폐허화되었다.

스페인의 막강한 가톨릭교회

유대인 추방이후 스페인에서는 가톨릭 밖에는 어떤 종교도 허락되지 않았고 가톨릭 교회는 왕실의 강력한 후원자 역할을 자임하면서 부와 권력을 손에 넣었다. 추기경과 주교 등 교회권력은 귀족층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대토지를 소유하고 영세한 농민들을 착취하면서 부를 축적했다. 이 당시 대부분의 농민들은 빈농으로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채 왕실과 귀족은 물론 교회에 종속되어 조세와 봉건적 지대 등의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가톨릭세력은 합스부르크가와 부르봉 왕조 등이 지배하는 정치적 격변기에도 기득권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20세기에 들어서서도 그 힘은 줄지 않았다. 1936년 선거를 통해 좌파연립정권이 들어서자 가톨릭교회는 합법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군사반란을 일으킨 프랑코로 대변되는 파시스트 세력을 지원했다. 이같은 가톨릭교회의 반역사적 행동에 분노한 노동자, 농민들은 교회를 불사르고 주교를 비롯한 많은 사제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거의 3년에 걸친 유혈참극은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가 상징하듯 양쪽에서 수십만명이 숨지고 수백만이 국외 망명을 택하는 등 엄청난 비극을 남겼다.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 1937년 4월 26일 독일 공군은 스페인 내전당시 반란군 수괴인 프랑코를 지원하기 위해 스페인 북부 바스크의 작은 게르니카를 융단폭격했다. 게르니카 공습은 민간인을 겨냥한 세계 최초의 집중 폭격으로 약 7천명 주민 중 1천 이상이 사망했다.

1939년 파시스트 세력이 내전에서 승리하자 가톨릭교회는 환호했고 스페인은 파시스트 정당인 팔랑헤 당과 대지주·가톨릭 교회의 대부분, 군부·대자본가 들이 연대해 정당활동, 집회, 결사의 자유, 파업 등을 인정하지 않는 등 전체주의 국가체제를 수립했다.

1975년 11월, 40년 가까이 철권통치를 해온 프랑코가 사망하자 스페인은 급속하게 민주화가 진행되었고 독재체제의 한축이었던 가톨릭교회도 국민들의 반감을 사면서 영향력을 상실해가기 시작했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에 따른 종교와 정치의 함수관계

1977년에 41년 만에 총선거가 실시되어 수아레스가 이끄는 민주중도연합이 압승을 거두었고, 1977년까지 프랑코 시대에 불법화되었던 정당활동이 자유화되었다. 1982년 3번째 총선에서는 곤살레스가 이끄는 사회당 정부가 출범하였으며 1993년 6월의 총선까지 승리해 4차례 연속집권하기도 했다. 사회당 정권은 집권하는 동안 과거청산을 시도했고 군부세력은 물론 가톨릭교회와도 대립했다. 군부세력과 가톨릭교회는 '옛 상처를 들쑤신다'며 반발했지만 여론은 사회당 정권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치적 민주화가 진행되고 스페인 가톨릭교회가 위기에 처해있는 사이에 공교롭게도 16세기 이후 거의 무시되다시피 했던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복원되기 시작했다. 스페인에서 가톨릭교회의 영향력 상실을 우려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7년 이 길을 거쳐 산티아고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이후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사람들로 넘쳐났고 결국 그 열기가 오늘의 한국땅에 까지 미치고 있다. 무기를 들지 않은 제2차 십자군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현재 스페인에서는 여전히 집권 사회당과 가톨릭교회 사이에 대립과 긴장은 계속되고 있다. 사회당 정부는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을 배제시키려 하고 있으며, 가톨릭교회는 현 정권의 낙태와 동성결혼 인정 등 진보적 조치들이 사회전통의 근간을 파괴시키고 가정해체 및 도덕적 권위를 몰락시키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파시스트 정권이 무너지고 사회민주화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스페인 가톨릭교회는 정치사회적 영향력은 상실했지만 국민다수가 가톨릭신자인 것을 감안해 종교적 가치를 내세우며 과거의 지위를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2008년 총선에서도 노골적으로 우파 정당을 지원해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시기에 화려하게 부활한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가톨릭교회에 커다란 힘이 되고 있다. 국내는 물론 각국의 순례자들이 스페인교회의 잠재적 지지자가 되고 있고, 이에 고무된 스페인 교회 역시 주요 거점도시의 성당마다 순례자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면서 교회 차원의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마지막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 순례자들을 위해 집전하는 장엄 미사는 대표적 이벤트중에 하나다.

문제는 항상 자기가 서있는 땅에서 해결해야 한다

한때 용도폐기되었다가 정치, 종교적 이유로 되살아난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스페인 가톨릭교회의 범죄에 무지한 한국의 순례자들의 놀이터가 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문제제기에 반박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내 문제를 해결하러 가는데 역사가 무슨 상관이고, 이 세상 어느 땅에 그런 문제가 없는 곳이 있느냐고 말한다면 그냥 다녀오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차라리 그 길을 걸으려면 자기 땅을 먼저 일주하고 가기를 권한다. 이 땅에 백두대간이라는 신령한 곳이 있고 다산 정약용, 고산 윤선도, 추사 김정희가 걸어간 길이 있다. 제주도에는 주민들의 삶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올레라는 환상적인 코스가 있다. 그리고 붓다와 예수,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수많은 성현들은 먼 곳을 가지도 않고 자기 땅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코엘료의 경우처럼 자신의 종교도 아니면서 이교도들의 피로 이루어진 멀고 먼 스페인의 시골길에서 방황하지 말고, 이 땅의 올곧은 지식인들과 백성들의 애환이 서린 곳에서 먼저 구원을 찾는 것이 옳지 않을 까 생각한다. 문제는 항상 자기가 서있는 땅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 궁극의 진리다.

백찬홍/유영모, 함석헌을 선생을 기리는 재단법인 씨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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