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박오늘

"얼마 전에 이곳 안동 시내 변두리 가로수로 심겨진 소나무가 하나같이 말라 죽어가는데 유달리 다닥다닥 열린 솔방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놀라움과 동시에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을 느꼈다. 과연 그랬구나! 여지껏 무심코 지나쳤고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아온 나무들도 이렇게 아프게 살아가는구나 싶어 가슴이 메어졌던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나 다른 짐승들처럼 스스로 옮겨다닐 수가 없다. 누군가 무엇엔가에 의해 한번 심겨지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날 수 없다. 가로수로 심겨진 소나무는 그렇게 달아나지도 못한 채 자동차가 내뿜는 독한 가스에 시달리며 죽어가는 것이다. 옛날 전설에 의하면 나무나 풀 같은 식물도 말을 할 줄 알았는데 말로 인해 인간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것을 본 다음 모든 나무와 풀이 입을 다물어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무들은 이렇게 지금도 자신들의 고통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단지 인간들이 아예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뻔뻔스러우리 만큼 모른 채 지나쳐온 것뿐이다."

몇 년 전 이 세상에서 소박하고 진솔하게 살다가 떠난 권정생 선생의 글이다. 이글은 <우리들의 하느님>(녹생평론사, 1996년, 101-2쪽)에 나온다. 그는 입시경쟁을 뚫고 대학교육을 받거나 날카로운 지성의 필봉을 휘둘러 우매한 서민들의 우러름을 받으며, 인간과 자연과 신에 대해 설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평생 병마와 싸우며 한적한 시골 작은 집에서 고독하게 지냈다. 그러나 그가 쓴 동화와 수필은 나도 아이들도 두고두고 읽으며 가슴과 영혼까지 깊이 젖어들게 한다.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일깨우고 실천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

나무와 풀이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인간이 말로 서로를 해치고 죽이는 것을 지켜보고 입을 다물어버렸다는 것, 그렇지만 나무는 입이 아니라 전 존재로 인간에게 살고 싶다고 살려 달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 인간은 나무가 호흡하며 내어주는 산소와 맑은 공기 없이는 10분도 살 수 없는 생명체라는 것, 그렇지만 인간은 인간끼리도 다른 생명체들과도 삶을 나누지 못할 만큼 모르쇠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이 이야기들은 모두 심각하게 숙고해 보고 살아가는 데 잊지 말아야 할 우리 사람의 숙제이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다음 세상에 또 태어난다면 '나무'로 나고 싶다고 늘 생각해 왔다. 동물은 무섭고, 사람의 삶은 너무나 거추장스럽고 어거지투성이라 여겨져서다. 아주 힘들 때면 가까이 서있는 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습관이 있는 나로서는, 나무가 되고 싶은 것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나무가 되면 뿌리는 어머니 땅에 포근히 안겨 있고, 가지와 나뭇잎은 세상과 하늘을 향하여 고요히 인사 나누면서 하느님과 땅과 인간의 본뜻을 오히려 더 깊이 헤아릴 것 같다.

그런데 말없는 나무와 풀들이 온 생명으로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죽어가고 있단다. 너무 많은 솔방울을 달고, 너무 무지한 사람들 틈에서 무심하게 말이다. 그들이 모두 죽고 나면 사람도, 아니 그들이 모두 죽기 전에 사람이 먼저 죽을지 모르는데. 이 우주는 한데 어울려 돌아가는 생명공동체인 것을.

 

유정원/ 가톨릭여성신학회 회원,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신학박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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