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순여사의 소망]

 

사진/김정식

우리나라를 부자나라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헛된 기대와 경제를 살려내겠다는 망상에 가까운 거짓공약이 만들어낸 새 정부가 출발한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잘살게 해 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모두가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끝없는 고통을 극복하지 못한 채 목숨을 버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무능한 정치권은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있어 절망의 끝은 더욱 보이지 않는다. 비교적 평화롭게 진행되었던 촛불집회에 물대포 난사와 무차별 구속이라는 폭력으로 대응하여, 동참하지 않았던 국민들까지 분노에 치를 떨게 하더니, 화재로 이어질 것을 빤히 알면서 소방차조차 준비시키지 않은 채 진압을 강행했던 용산참사는 서울의 팔레스타인 학살로 비유되기까지 했을 정도이다.

계속되는 지지율하락과 촛불을 통해 분출되는 국민 대다수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강경대응과 밀어붙이기로 일관하고 있는 대통령의 근본적인 어려움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입버릇처럼 말해왔던 소통부재인 것 같다. 어린이들조차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 있는 민심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대통령이 소통을 못하고 왕따가 된 이유를 그의 언어습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린이의 질문에도 성심성의껏 존댓말로 답해 주었던 전임 두 대통령들과 달리, 대통령 후보로 나와 유세할 때부터 지금까지 방송을 통해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모조리 반말태도로 일관하여 불쾌하다는 것이다. 역대 어느 대통령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불손한 반말태도가 사소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소통장애의 원인으로까지 간주되고 있다면 대화를 통해 상대의 마음을 짚어내는 것은 소통의 중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  

 

 

 

 

 


 

우연한 자리에서 만난 서봉순 아주머니의 따뜻한 소통을 나누고 싶다. 늦게 결혼하여 어렵게 첫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고 나서 맨 먼저 알리고 싶은 사람은 당연히 친정 어머니였다. 전라도 나주까지 내려갈 형편은 못되어서 전화를 걸고 싶은데 모두가 어렵던 그 시절에 전화가 있는 집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경기도 광명 끝자락에서 개봉동우체국까지 이 십리 길을 걸어가서 친정 동네에 전화가 있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청서를 접수하고 기다려야 했고, 순서에 따라 한참 만에 연결되어 우체국직원이 지정해 주는 부스로 가서 송화기를 들었다. 

“정남엄니. 나 봉순이여라우. 울 엄니 쪼깐(좀) 바꿔 주쑈.”

정남엄니는 전화기를 놓아둔 채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이웃집에 가서 그녀의 어머니를 불러왔다.

“엄니. 나 봉순이여라우.”

“잉. 그래. 믄(무슨) 일이냐?”

“엄니~. 엄니~. 나 거시기 했어라우.”

“믓아? (뭐?)

“아따. 엄니. 나 거시기 했당께잉.”

“애기야?(애를 가졌단 말이냐?)
“응.”

“쓰겄다.(그래 참 좋은 일이구나. 참 잘했다.)

이게 전부였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통화료가 부가되기에 오래 말할 수도 없지만, 더 이상 말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서른두 살이라는 늦은 나이의 딸을 시집보낸 후 쉽게 애가 들어서지 않아 속을 태우던 어머니는 길을 가다 임신한 여자만 보면 발걸음을 멈추고 부러운 눈으로 오래도록 바라보았다고 했다.
“시상에. 저런 사람은 믄 복을 타고 났으까잉.(무슨 복을 타고났기에)
혼잣말을 곱씹으며 딸에게도 어서 아이가 들어서기를 천지신명께 빌고 바랬었다. 그토록 간절했던 소망을 이루었는데도 어머니의 대답은 딱 한마디, ‘쓰겄다’였다. 또한 아직은 갓 결혼한 새댁인지라, 부끄러움 때문에 차마 어머니에게조차 임신했다고 말할 수 없어 ‘거시기 했다’고 말했음에도 어머니는 다 알아들으셨다. 신뢰와 확신을 통해 서로에게 흐르는 사랑 때문에 굳이 길고 자상하게 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을 얼마든지 읽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소통이라는 화두의 진수라고 여겨진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사람에게로 향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아차리는 열쇠가 되어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쇄신되고 회복된 구원론에 따르면, 하느님의 사랑은 초월적인 것이어서 인간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삼무(三無,무한 무조건 무상)로 무차별 난사된다. 우리의 삶의 행태나 하느님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에 따른 결과로써 사랑과 구원이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아도 하느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적 같은 사랑이 너무도 감사해서 절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싶어져야 한다. 그렇게 될 때 하느님의 사랑을 참되게 누리게 되고, 마침내 하느님과의 쌍방소통이 가능해진다. 마치 서봉순 아주머니와 친정어머니의 소통처럼.
“하느님. 나 시방 검나게 거시기 허요. 그랑께 거시기 해주쑈잉.”
“쓰것다.”

이런 깨달음은 일반적인 기독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체현되기는 쉽지 않고, 성경을 통해 만나는 구약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관과는 완전히 다르다. 실제로도 유대교와 기독교는 전혀 다른 종교임에도 많은 기독신자들은 구약성경을 통한 하느님 만나는 방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기독신자 생활을 때로 즐기고 있다. 마치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은 채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가난한 이웃 팔레스타인에게 학살과 폭력을 멈추지 않는 이스라엘처럼.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란 고통 속에서조차 잃지 않고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아니라, 여전히 혹독한 겨울을 견뎌낸 후에야 만날 수 있는 봄 같은 것이다.


 

 

 

 

 

평범한 소시민 서봉순 아주머니가 말했다.
“모두가 힘들어 죽겄다는디 대통령은 안 힘드까잉? 살린다던 경제는 못 살리고 사람만 죽어나가고 있당께. 그 냥반이 하느님을 믿는다고 혀서, 우리 같은 사람들 심정을 쪼깐(조금) 알아 줄랑가 기대를 했는디, 영 아닌갑네. 허기사 믿는 도끼가 발등 찍는다고, 하느님 믿는 사람들이 더 허더랑께. 신부 수녀들이 이라고 저라고 허는 성모병원에서도 거시기 허든디, 거그따가(그 쪽에다) 거시기를 헐 수가 있겄어?”

개신교회의 장로인 대통령이 자신이 믿고 섬기는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하느님이 스며있는 국민들과 올바른 쌍방소통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그에게 무턱대고 믿는 일에 그치지 말고 하느님을 참되게 알고 하느님을 살아내는 깨달음의 삶을 주문하는 것은 무리일까? 애어른을 가리지 않고 말과 행동으로 무차별 폭력을 행사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차별 난사를 통해 퍼부어주시는 무한, 무상, 무조건의 사랑과 신뢰를 닮아, 대다수의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귀를 열고 들어주라고 부탁하면 ‘그건 당신 생각이고’ 라고 응수할까? 이런 바람을 무리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지난 해 여름 광우병 소고기 수입과 대운하 건설 그리고 교육정책에 반대하던 촛불들이 외치는 소리를 다시 한 번 들려주고 싶다.
“거시기 하지 마. 제발”
혹시 거시기가 뭐시긴지 잘 모르겠다면, 뭘 하지 말라는 것인지 전혀 짐작이 안 간다면 현재 하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멈추면 된다. 대통령이 하는 일 대부분이 거시기에 해당된다.

2009년 2월 2일

 

김정식/가수 겸 작곡가로 생활성가의 개척자이며, 파리국립음악원에서 그레고리안과 지휘법을 공부하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위한 자선음악회와 환경보전과 인권회복을 위한 사회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와 예술가요 및 연주곡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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