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인생사]


이걸 어떻게 얘기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어머니가 둘이다. 나를 낳아주신 ‘욕쟁이 할머니’ 우리 엄마는 5년 전 돌아가셨고, 또 한 분의 어머니 (이 분이 평생 남편 구경 못하고 시골에서 사신 나의 호적상의 어머니다) 는 지금 증평에서 내 친형과 함께 사신다.

딸을 하나 낳아 기르다 서울로 도망친 양반이 우리 아버지이고, 도망친 남편 기다리며 평생 시부모 공양한 양반이 지금 증평에 사시는 어머니이며, 혼인 관계에 대해 일체 함구한 채 죽어라 하고 사랑을 고백한 우리 아버지에게 일생을 맡긴 분이 바로 돌아가신 우리 친어머니다. 여기 까지는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겠으나 이제부터 정말로 드문 얘기를 하겠다.

일단 시골에 본처가 있다는 것을 안 우리 어머니는 본처를 만났단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머리끄뎅이를 잡든지 고소를 하든지 해야 할 판이었지만 배포 큰 우리 어머니는 그러지 않으셨다. 들은 얘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당신이 경숙이 엄마요?” (경숙이는 증평 어머니가 낳은 딸, 말하자면 나의 배다른 누나다)
“그런디유.”
“...... 이거..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단 말이요.”
“아들 못 난 죄인이 뭔 얘기를 한대유.”
“아들 못 난 죄? 그런 죄가 어디 있답니까. 까짓 거 내가 아들 하나 주리다.”
(그 때는 아직 내가 태어나기 전이니 말하자면 어머니는 외아들을 그냥 내 준 것이다)
믿지 않아도 그만이다. 왜? 사실이니까...

결국 그 날 이후로 나와 형은 방학 때나 만나는 사이가 되었고 나는 호적상 삼남매나 되는 집에서, 철들면서부터 외아들로 자랐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증평의 어머니 (나는 그 분을, 공주에 있는 엄마라는 뜻으로 공주엄마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공주엄마는 친딸보다 우리 형을 더 끔찍하게 위했다. 맛있는 걸 해도 늘 누나보다 형이 먼저고 육성회비를 내도 늘 형이 먼저였다. 형이 낮잠을 자면 식구들은 조용해야 했고 가끔 방학 때 내려가는 나는 본체만체한 채 그저, 형만 챙겼다. 그렇게 지금까지 형하고 살고 계시다. 형이 장가를 못 간 탓에 80노인인 당신이 아직도 싱크대를 오락가락해야 한다는 것을 전혀 힘들어하지 않으신다. 까닭모를 무기력증에 빠져 3년이 넘게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무위도식하고 있는 형 대신 닭을 키우고, 관상용 새를 키우고, 텃밭을 일구면서 허리를 잔뜩 구부린 노인네가 그렇게 살고 계신다. 그리고 이번 설날... 공주엄마는 내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영국아... 형이 얼마 전부터 운동도 하고... 일을 나가...”
그야말로 최고의 소식이었다.
“예? 일을 나가요? 이런... 어머니.... 이게...”
나는 거의 울 뻔 했다. 형이 일을 나가다니...

마침 어디 갔다가 들어오는 형에게 달려가서 얼싸 안았다.

“일을 나간다며. 잘했어 형. 정말 잘했어 형..”
“뭐... 벼벼벼별 건 아아아아니여”
(우리 형은 말을 좀 더듬는다)
“형 뭐 먹고 싶어. 다 얘기해. 내가 사줄께.”
“뭐뭐뭔... 얘기여.... (지갑을 보여주며) 나나나나도... 돈 있어.”
“근데 무슨 일을 하는 거야 응? 나도 좀 알자. 너무 좋아서 그래...”
“시시시장... 가가서.. 괴괴괴기...사주주줄테니께 아아앞장 서.. 이눔아.”


형의 입에서 얼마 만에 들어보는 ‘이눔아’인가. 아 그리웠던 형의 카리스마여...
나는 딸내미를 불렀다.

“지연아 이놈아.”
“왜 그래 아빠?”
“큰아버지가 임마 너 먹고 싶은 거 다 사 준대. 빨리 나와.”
“진짜?”

눈치가 제 애비 뺨치는 딸내미가 일부러 깡총거리며 뛰어왔고 마누라와 나는 형님을 따라 시장에 갔다. 그리고 두툼한 지갑을 열어 계산을 하는 형의 표정은 마치 겨울 햇살처럼 눈부셨다. 기뻤다. 정말 기뻤다.
그런데 집에 온 우리를, 공주 엄마가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 왜 그래요? 어디 아프세요?”
“아니... 뭐.... 형은 워디 갔댜?”
“조금 더 걷는다고 나갔어요. 진짜 요즘 운동 열심히 하나봐?”
“그려? 그람 내 얘기 좀 들어봐. 실은 말이여, 형이 공공근로에 나가는 겨. 내가 면장님헌티 부탁해서... 그란디 그걸 니가 알면 창피할 거 아녀? 그라니께 모른 체 하고 있어 잉?”

나는 그만 눈물이 났다.

공공근로 아니라 더한 것을 해도 좋다. 나는 형이 누워 있지 않고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좋다. 그건 분명 기적이다. 형이 삶에 대한 의지를 가졌다는 증거니까 나는 마냥 좋다. 허나 형을 위해 노구를 끌고 10리는 떨어진 면사무소에 가서 굽은 허리 억지로 펴, 팔을 창구에 올리고 면장님한테 손이 발이 되게 빌었을 공주엄마를 생각하니 눈물이 나왔다. 그것도 형이 알까 몰래 몰래 쉬쉬하며, 몇날 며칠을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그랬을 것 아닌가.

“형이 먼저 신청한 겨. 근디 원체가 불경기라 그것도 허기가 어렵다는 겨. 그려 내가 가서 면장님을 만난 겨. 절대루 함구 허야 헌다. 잉? 형은 내가 거기 갔다 온 거 몰러...”

아...
제 배 아파 낳은 자식도 아닌 자식에게 온몸을 주는 공주엄마.....
나는 이번 설에도 그 작은 양반에게 사랑이 뭔지 배운다...
그리고
남자 뺨치게 배포가 컸던 우리 엄마와...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짐작하지도 못할 깊은 속내로 형을 사랑하시는 공주엄마..
그 둘에게 씻지 못할 상처를 주고 자기 혼자 훌쩍 가버린 아버지를 조금 미워해봤다.

변영국/ 토마스 아퀴나스, 서울 수송국민학교를 졸업했으며 희곡 쓰고 연출하는 연극인인 동시에 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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