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의 교회문화 이야기]


한국교회에는 본당에 상주하는 본당수녀가 있다. 옛날에는 전교수녀로 더 많이 불렀다. 이들은 본당에 살면서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사제수가 부족하고 평신도 사도직이 활성화되지 않았을 때 이들의 활약은 대단하였다. 여전히 중소도시나 시골 본당에서 이들의 역할은 지대하다. 그러던 이들이 최근 역할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 원인은 보좌신부들이 파견되면서 활동영역을 넓히고, 평신도 사도직이 활성화되면서 밑에서 위로 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사제는 신자들과 접촉하는 면적을 넓히려 밑으로 내려오고, 신자들 역시 중간 매개 없이 사제와 직접 접촉하기를 바라며 건너뛰기를 하다 보니 사제 평신도 두 신원 간에 넓게 존재하던 완충지대가 엷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사제들은 본당수녀들에게 존재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 때 본당수녀의 존재양식은 신자와 관련된 어떤 일도 맡지 않고 기도만 하면서 상징적인 존재로 머무는 것이다. 제대 벽에 걸린 십자고상이나 감실등 처럼 그 자리에 걸려 묵묵히 존재만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제들은 이러한 역할에 덧붙여 신자들과의 영적 상담을 맡도록 요구하기도 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본당 내부일이 아닌 봉성체, 신자 및 냉담자 방문, 지역활동을 맡기기도 한다. 존재적 역할이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당수녀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존재’라는 말이 ‘수녀의 퇴출 대기’ 이거나 ‘사제와 수도자 간 냉전’을 숨기기 위한 목적으로 더 많이 이용된다고 한다. 존재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제가 있기나 한지 의심스럽다고 힐난하기도 한다. 어느 말이 옳은가? 그리고 이러한 경우 ‘존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 생각은 이렇다. 본당수녀들은 쇼 윈도우의 마네킹처럼 존재하기 위해 본당에 온 것이 아니다. 과거 전교수녀로 불리던 때처럼 사제들의 협력자로, 교리교사로, 그리고 선교사로 온 것이다. 역할은 본당의 상황과 조건에 따라 수시로 바뀌기는 하지만 대체로 이러한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수도자는 사제 성소, 수도자 성소를 견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성적 역할로 사제의 부성적 역할을 보완하기도 한다. 실제로 본당수녀의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는 곳은 그렇지 않거나 아예 없는 본당에 비하여 모든 지표에서 월등하다. 수원교구가 지난 9년 동안 발행한 복음화보고서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왜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냉대를 받게 된 것일까? 각 신원의 입장을 들어본다.

먼저 수녀의 입장. “본당신부들의 생활을 속속들이 알기 때문에 불편한 거에요. 24시간 같은 공간 내에 살다보니 모든 생활이 노출되기 때문이지요.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의 본당을 맡고 있는 동안에 수녀를 내보내고 싶은데 '수녀 내쫓은 신부'라는 꼬리표가 붙는 게 두려워 수녀들이 지쳐 스스로 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물론 사제들이 제 역할을 하고 평신도들이 제 역할을 감당하면 수도자가 할 일이 없어요. 이런 상황이라면 수녀의 역할이 줄어드는 것이 바람직해요. 이런 경우에는 본당에 수녀가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지요. 신자들도 이런 상황에서는 눈치를 주는 것 같아요. 그러나 대부분은 그냥저냥 충돌을 회피하면서 최소한의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이 현재의 모습인 것 같아요.”

사제의 입장. “신자들의 지적 수준이 상승한데 비하면 수녀들의 지적 수준이 낮아요. 본당 사도직에 준비되지 않은 수녀들도 많구요. 사목보조자로 왔으면 순명하며 협력해야 하는데 자신이 사목자인 줄 알아요. 그리고 과거 2인자 시절을 그리워하는 모습도 보여요. 직무 수행능력이 평신도들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솔직히 평신도들이 다 대체할 수 있는데 굳이 본당에 있을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신자의 입장. “과거 저희가 잘 몰랐을 때는 수녀님들에게 의지를 많이 했는데 이제는 저희가 좀 알다보니 솔직히 모든 일을 신부님과 직접 해결하게 돼요. 신부님들도 중간에 수녀님들이 끼는 것을 탐탁치 않게 보시구요. 그래서 본당 일에 수녀님들이 관여하는 폭이 많이 줄었어요. 여전히 필요로 하는 구석이 많지만 어떤 때는 간섭하는 것 같아 불편해요. 하지만 어떤 신자들은 신부님보다 수녀님들을 더 따라요. 실제로 수녀님들이 더 잘 이해해주기도 하구요.”

물론 이런 상황은 대도시나 중소도시 소재 일부 본당에 국한된 이야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신자인구 분포로 볼 때 이런 경우가 훨씬 더 많기 때문에 보편적인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본당수녀는 당분간 본당에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러려면 역할을 조정해주어야 할 것이다. 존재라는 추상적인 말을 사용하지 말고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주임신부가 큰 권한을 갖고 있는 구조에서 본당수녀 스스로 제 역할을 찾기는 어렵다. 구체적으로 역할을 지정해줘야 한다. 그런데 이 역할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본당의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기 때문에 본당구성원들이 협의하여 그때 그때 역할을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만큼 사제나 수도자나 평신도들이 본당과 지역 상황에 민감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역할이 주어지지 않으면 존재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멀쩡하게 일을 잘 하고 있는 사람에게 책상을 주지 않고 일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존재이유가 없다면 교회구성원이 합의하여 결정을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제 개인의 사감이나 일부 평신도들의 입장 만으로 본당 공동체 전체에 유익이 될 수 있는 결정을 내려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본당수녀들도 변화한 본당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적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과거보다 변화의 속도가 빠르므로 깨어 식별하지 않으면 어느 신원도 바른 결정을 내릴 수 없다. 모든 신원이 서로의 행복을 위하여 헌신하는 아름다운 본당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박문수/ 프란치스코,  가톨릭대학 문화영성대학원 초빙교수, 평신도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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