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5일자 1004호 <평화신문>과 2633호 <가톨릭신문>

천주교인은 한 때 ‘인륜을 저버린 집단’으로 모욕당했다.

설날이 지나갔다. 참 좋은 명절이다. 두 나라로 갈라져 있는 현재의 한반도 구성원이 공통으로 맞이하는 몇 안 되는 날이기도 하다. 그만큼 한민족에게는 잊지 못할 명절이고 깊은 의미이기도 하다. 아무리 양력 정월 초하루가 어떻고, 해맞이가 어떠하다고 할지라도 한민족 대다수에게 이념적 신분적 종교적 지역적 제약을 벗어나 삼가하고 조심하는 날,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는 날, 조상들에게 고마움의 정을 질박한 음식과 맑은 술로 표현하는 날, 더불어 흥겨운 날로 맞이하는 날이다.

한국천주교회로서는 민족 명절인 설날에 대하여 뺄 것도, 더할 것도 없는 담담한 입장이겠지만, 설날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차례로 표현하는 「제사문제」에 대해서는 시원섭섭한 양면의 모습을 분명히 지니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설날을 맞이하여 관련기사를 <평화신문>이 11면 전면에 걸쳐 주교회의가 인준한 ‘상장예식서’ 별책을 인용하여 차례(제사)상 차림과 함께 소개하였고, 조상제사에 대한 교회 가르침을 곁들였다. <가톨릭신문>은 몇 번 같은 시기에 비슷한 내용을 소개한 것이 식상했는지 이번에는 별 다른 기사를 실지 않았다.

‘갈라진 형제’라고 표현하는 개신교인에게 천주교인이 서로 다른 점을, 아니 우월감(?)을 이렇게 생뚱맞게 표현한다. “우린 술 담배도 하고, 제사도 지내고, 돈도 적게 낸다. 그리고 사모도 없다.” 맞기는 맞는 말이지만 무언가 허전한 비교거리이다. 어쨌든 그 중의 하나가 천주교회가 지낸다는 「조상제사」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천주교인이 아는 대로 우린 이 문제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신앙선조들이 있다.

한국천주교회사를 일별한 분들은 알고 있는 것처럼 조상제사문제는 경기도 광주 땅 천진암에서 시작되어 이벽의 수표동 집을 거쳐 현재의 명동성당 터인 김범우의 명례방으로 오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1790년경 중국을 통해서 알려진 베네딕토 14세가 명령한 ‘조상제사는 미신행위로 간주하여 금지한다’는 내용은 당시의 천주교인들을 혼란과 분열로 빠져들게 했으며, 결론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길로-그것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다른 몫일 것이다- 들어가게 했다. 천주교인은 ‘인륜을 저버린 집단’으로서 한민족에게는 왕따일 수밖에 없었다. 

‘상장예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 이후 한국천주교회가 1886년 한불조약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지만 제사문제만큼은 자유롭지 않았다. 아니 자유롭지 못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미신행위로서 금지 상태에 있었다. 개신교인에게 “우리는 제사도 지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불과 60여 년 전인 1939년 교황 비오 12세가 발표한 <중국 의식에 관한 훈령>을 통해서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바티칸은 비로소 조상제사가 미신이나 우상숭배가 아니라 문화적 풍속이라 해석을 했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너무한다고 해야 하는 것인지, 그냥 웃을 일인지는 세상이 판단하리라.

교황의 훈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천주교회는 제사문제를 허락(?)만 했을 뿐이지, 당연히 적극적이지 않았다. 박해의 여파가 은연중 몸에 배인 구 교우들은 이미 제사를 없앴으며, 미신행위로 인식하는 개신교풍의 신세대 교우들은 낯설어 할뿐이고, 전통풍습에서 살다가 천주교회에 입교한 사람들은 엉거주춤한 인식뿐인 것이 작금의 현실은 아닐지? 한국천주교회가 ‘상제례 토착화연구특별위원회’를 통하여 가톨릭 상제례 예식시안을 발표한 것은 현재의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들어와서 행한 일이다. 그러나 거간의 이야기에는 사뭇 많은 논의가 묻혀 있다.

결국 주교회의 전례위원회는 시안을 수정, 보완하는 과정에서 ‘제례’부분은 삭제하였다. 이는 교회의 공식 전례서에 제례를 함께 실을 수 없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예식서의 명칭은 ‘상제례 예식서’가 아닌 ‘상장(례) 예식서’로 하고 ‘제사’ 시안을 부록(별책)에 넣은 것이다. 이것을 2002년 주교회의 가을 정기총회에서 결정하고 2004년 <상장예식>이 발간되었다. 사실 이 예식서만 하더라도 1864년 목판본으로 발행된 ‘천주 성교 예규’의 개정판이니 참으로 격세지감이 앞설 따름이다. 2세기만의 개정. 천주교회는 이해관계에 얽히면 하루 만에도 반응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와 같은 엄청난 느림보임에 틀림없다.

애초에 많은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을 포함한 타민족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바티칸의 잘못이 크다. 또한 그와 같은 결정이 불러온 형언할 수 없는 억울한 죽음과 무자비한 탄압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21세기를 열며 2000년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2세는 ‘용서의 날’ 미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타민족의 문화와 종교를 업신여긴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하였다. 다 지난 일이지만 동아시아의 제사를 미신으로 판단한 것으로 알려진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는 현재의 음식물 차리고 향 피우는 제사를 문화적 풍속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리고 그로 인한 수많은 희생자와 종교박해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은 가지고 있는 것인가?

설날의 차례와 기일의 제사가 ‘행사’ 일수는 없다. 그 안에 담겨진 감사와 공경의 정신이 아니라면 아무리 제례가 발전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의미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상들과의 통교 속에서 위로와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 해마다 복을 빌어주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은 고유명절을 맞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큰 축복일 것이다. 교계신문에 그런 감사함이 담기게 할 수는 없을까? ‘설 연휴관계로 다음 주 쉰다’는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너를 축복하시고, 지켜주시고, 비추시고, 은혜와 평화를 베푸시는”(설날 제1독서 민수 6,22-27) 하느님을 알려주는 일이다. 덩치 크고 느린 교회가 일일이 못하는 일을 현대 문명의 이기인 언론이 발 빠르게 행하시라.
 

김유철/경남민언련 이사, 경남도민일보 지면평가위원,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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