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의 주말영화] <벤다 빌릴리>, 리노드 바렛, 플로렝 드 라 툴라예 감독, 2010년작, 현재 상영 중

▲ <벤다 빌릴리!>, 르노 바렛 · 플로랑 드 라 툴라예 감독, 2010년작
<벤다 빌릴리>는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사의 장애인, 노숙자로 구성된 거리 음악가 ‘스태프 벤다 빌릴리’가 역경을 뚫고 세계적인 밴드로 성공하는 과정을 다룬 음악 다큐멘터리이다. 이런 영화는 과거에도 많았는데라고 기시감을 느끼실 분이 있을 듯하다. 그러나 단언컨대 <벤다 빌릴리>에는 관객이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끔 하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

그렇다. 이 가을, 필견의 영화로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놓치면 후회할 것이라고, ‘단언컨대’를 재사용하고 싶지만 (꾹 참고) 그냥 말하겠다. 특히 ‘꽃동네’의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라는 슬로건이 머리로 이해가 갔지만 가슴으로는 과연 그럴까라는 물음표가 걸렸던 분이라면 정말이지 꼭 보셨으면 좋겠다.

2000년대 아프리카 콩고의 삶은 50여 년 전의 한국과 유사하다. 정국은 불안정하고 산업기반이 취약한 까닭에, 가진 게 몸뿐인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가장 손쉬운 길이 도둑질로 여겨지는 상황인 것이다. 이를 멜로로 푼다면 아마 <맨발의 청춘>(김기덕 감독, 1964)이 만들어질 것이다. <벤다 빌릴리> 서두에서는 “나라가 개판이니 훔칠 수밖에”라는 말로 척박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그렇다면 범죄의 길을 거부할 때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아마도 식민지인을 조상으로 둔 유럽인의 도움을 받아 식민자의 땅, 유럽에 가서 성공하는 방법이 그것일 터이다.

이는 아프리카인의 ‘유러피안 드림’이라 할 수 있을 것. 장애인 리키가 주축이 되고, 우유깡통에 동여맨 한 줄 기타 ‘사통게’ 연주가인 조숙한 소년 로제가 결합한 ‘스태프 벤다 빌릴리’는 타고난 재능과 무한한 긍정의 힘으로 유럽에서 온 ‘객(客)’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2004년 리노드 바렛, 플로렝 드 라 툴라예는 킨샤사의 도시음악을 취재하러 갔다가 이들에게 매료되어 자비로 이들의 음반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음반 제작은 생각만큼 쉽게 풀리지 않는다.

이때 영화 제작자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드러낸다. “(우리는) 이 일이 5년이나 걸릴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고. 이들은 영화의 주체가 ‘스태프 벤다 빌릴리’이지 자신이 아님을,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객(客)이고 외지인임을 잊지 않는다. 이 겸손한 카메라는 영화를 단순하게도 만들지만 편견 없이 대상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주인공인 ‘스태프 벤다 빌릴리’의 음악과 건강한 매력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우여곡절 끝에 발매된 앨범 <트레트레 포르>는 성공을 거두고, 아버지가 유럽 페스티발에 초청되었음을 기뻐하는 아들과 친구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런데 유럽이 그렇게 대단한 거야?” “그럼.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잖아.” “그래?” “(유럽은) 신이 우리나라와 비교하려고 만든 나라야.” 이때 카메라는 아이들의 뒤를 따를 뿐 어떠한 주석도 삼가지만, 이러한 대화를 삽입함으로써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 식민자의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한 걸까?

그러나 식민자의 시혜적 시선을 느끼기에는 영화가 묘사하는 유럽은 콩고에 비해 생기가 크게 떨어지는 곳이다. 페스티발 현장에서는 ‘스태프 벤다 빌릴리’의 음악과 에너지가 이를 다소 중화하지만 음악이 끊긴 이들의 휴식 공간은 썰렁하기 그지없다. 이들이 머문 숙소의 호텔에서 앞자리 스펠 HOT만 클로즈업함으로써 이들의 ‘핫’한 성공을 시각적으로 제시하지만, 새하얀 불빛이 주는 감흥은 상대적으로 서늘하기만 한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음악을 따라 춤을 추듯 자유로웠던 카메라 워킹과 프레임을 기억한다면 이 변화는 오히려 유럽인들의 자기 환멸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는 이들의 성공을 비추고 급작스럽게 끝난다. 성급한 마무리를 보면서 드는 생각의 갈래는 여럿이었다. 첫째, ‘스태프 벤다 빌릴리’의 성공을 지지하고 보여줌으로써 카메라의 역할은 끝이 났다는, 사려 깊은 물러섬이다. 둘째, 이들의 음악이 미완의 일상처럼 미완임을, 삶을 비추는 영화 역시 그러함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성공담 이후의 서사는 콩고인들이 스스로 찍고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해야만 빛의 이면에 그림자가 뒤따른다는 성공담의 클리셰(cliche, 판에 박은 듯 진부한 표현)를 넘어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생각. 넷째, 영화의 완결성을 생각한다면, 흠결이 없다 하기 어렵겠지만, ‘스태프 벤다 빌릴리’의 이야기라면, 미완의 서사가 그리 큰 흠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 등등.

누구나 보는 내내 타악기의 흥에 어깨가 절로 들썩이는 영화가 될 것이다. 연주와 댄스 장면의 매력이야 두말하면 사족이다. 여기에 장애인이 전혀 불편하게 그려지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들은 수족이 멀쩡한 사람들보다 더 유쾌하게 인생을 긍정하고 즐기고 있었다. 이중에서도 특히 놀라웠던 장면은 하반신이 불편한 이들의 손 축구 장면이었다. 선수들은 두 팔로 달리면서 재빨리 공수전환을 하고, 어시스트를 하고 또 멋지게 골을 넣었다.

들뢰즈는 인간이 태어나면서 두 팔을 대지에서 떨어뜨림으로써 탈영토화하지만 도구를 씀으로써 재영토화한다고 말했다. <벤다 빌릴리>의 인간은 두 팔을 땅에 붙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어서 탈영토화가 불가능한 나약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 두 팔로 악기를 연주하고 보통 사람보다 멋지게 춤을 춤으로써 이러한 인식과 규정을 훌쩍 넘어서는 승리를 보여준다. 이들의 앨범 <트레트레 포르>는 ‘강한 사람들’이라고 번역된다. 그러나 트레(tres)는 한국어로 ‘매우, 아주’의 의미를 가지므로, ‘무지무지하게 강한 사람들’이 본뜻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한다.
 

 
 

진수미 (카타리나)
시인. 한국문학과 영화를 전공으로 삼고 있다.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 <시와 회화의 현대적 만남>을 썼다. 가톨릭청년성서모임 출신. 작은형제회 <평화의 사도>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가톨리시즘이 담긴 시를 같은 지면에 소개했다. 덧붙여, 시는 영혼이고 영화는 삶이다. 펄프 향 풍기는 ‘거기’서 먼지와 정전기 날리는 ‘여기’로 경로 이동 중. 덕분에 머리는 산발이지만 약간 더 명랑해지고 조금 덜 외로워졌다고 믿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