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너머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현장인문학’ 워크숍 열어

고병권씨가 기조발제를 하고 있다.

지난 12월 17일 오후 1시부터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삶의 현장에서 인문학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경험과 생각을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수유+너머’의 2008년 학술제를 여는 마당으로 진행된 이 ‘현장인문학 워크숍’에는 노들장애인야학과 인권실천시민연대, 다시서기센터, 사회복지법인 W-ing, 연구공간 수유+너머 등이 공동주최 하였는데, 약 100여 명의 참석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제발표가 이어졌다.

기조발제를 맡은 고병권 추장(수유+너머)은 대학의 인문학자들이 국가와 자본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인문학이 위기’라고 말할 때, 가난한 이들과 오랫동안 연대해 온 활동가들은 ‘현장인문학’을 주장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오히려 ‘인문학이 희망’이라고 외쳐왔다고 했다. 이들은 ‘인문학에 돈을’ 이라고 외치는 제도권 인문학자들에 반대하며 ‘돈보다 인문학’을 주장해 왔다는 것이다. 현장인문학을 하려는 이들에게 영감을 준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책에서는 “정치적 삶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길이라면, 인문학은 성찰적 사고와 정치적 삶에 입문하는 입구”라고 말한다.

그동안 현장인문학의 세례를 받았던 장애자들과 재소자들과 노숙인들과 매매춘여성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계량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숙인 인문학 프로그램인 ‘성 프란시스 대학’ 1기 수료생 중 하나는 “나는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누가 어떤 혹평을 할지라도, 글 안에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고, 어느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하였으며, <평화인문학>에 참여한 어느 재소자는 “지금까지는 석방되면 어떻게 먹고 살까만을 열심히 고민했는데, 이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가 고민이 되었다”고 말한다고 전했다.

배움이 곧바로 삶의 변화로

한편 인문학자는 산타클로스처럼 배움이라는 구원의 선물을 일방적으로 전해주는 자가 아니라, ‘교수(professer)'라는 말이 뜻하듯이 ‘고백적이고 수행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인문학자는 “배움의 장에서 말한 대로 살아야 하고, 살아온 대로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난한 이들이 인문학을 통해 희망을 길어 올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학자들처럼 하나의 지식을 다른 지식을 참조하면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야기를 들으면 바로 자신의 삶을 참조하여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는데, 선생님의 말은 그 일을 가리키는 겁니까?” 하고 묻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삶에 참조하면서 배우기 때문에, 그 배움이 곧바로 삶의 변화로 나타난다.

고병권 추장은 오늘날 인문학자들에게 공부란 정보를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식을 취하고 전해주면 그만일 뿐, 자기고백적인 수행이 요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삶과 분리된 앎은 정보의 형태로 상품처럼 가공되고 판매되기도 한다. 돈을 받고 앎을 팔고, 돈을 내고 앎을 얻는, 한 마디로 삶의 소통 없이 앎을 거래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해 졌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현장인문학이 “가난한 이들이 자기 안에서 학자를 발견하고 ‘학자-되기’를 시도하도록” 도와야 한다면서, 인문학자들에겐 ‘어린이-되기’, ‘부랑자-되기’, ‘여성-되기’를 주문했다. 곧, 현장의 인문학자는 재소자가 되고, 여성이 되고, 노숙인이 되고, 장애인이 됨으로써 ‘인간됨 전체’를 문제 삼는 자기해방의 길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문학, 가난한 이들의 살아가는 무기

노들장애인야학 박경석 교장

노들장애인야학의 박경석 교장은 “장애인 문제로 노상 거리에서 투쟁만 하다가 인문학 강좌를 통해 새로운 시도가 일어났다”고 평가하였는데, 이 학교 교사인 민구씨는 장애 때문에 학교와 사회로부터 거부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에게 인문학 강의는 “수업을 해도 열정이 없고 습관적으로 야학을 나오던 사람들에게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고민해 보는 실마리를 던져주었다”고 말한다.

한소리반 교사인 혜선씨는 “부자아줌마들한테 인문학은 옷을 입는 것 정도의 사치일 수 있지만 우리한테는 살아가는 무기가 된다”고 말했는데, 이날 발표를 했던 김유미 교사는 "강의 대상이 장애인이라면 장애인의 감수성을 자극하기 위해서 헬렌 켈러나 스티븐 호킹 등이 소개되면 좋겠다"고 하면서 다른 소수자들을 만나서 이해할 수 있도록 공동강의를 기획해 보자고 주문하였다.  

2007년부터 법무부와 교도소에서 ‘평화인문학’ 강좌를 열어온 인권실천시민연대의 최철규씨는 “만약 인문학이 자존감을 상실하여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정신적 위로가 되고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실천적 힘을 제공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인문학 교육을 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말했다. 최철규씨에 따르면, 교도소에서는 교정교육으로 가석방 심사에 반영하거나 교육성과가 금방 확인되는 자격증 취득 등의 생계형 교육이 대부분이지만, 자격증을 취득하더라도 정작 출감 후 취업의 기회를 얻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 여기서 평화인문학은 “재소자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약자, 소외, 주변, 변방이라는 이미지를 깨고, 그들도 역시 사회의 당당한 일원임을 알게 해서 스스로 존엄한 삶을 살 권리를 요구하게 만드는 인권교육”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김동훈 교수(성프란시스 대학 예술사 담당)는 노숙인들에게 예술사를 강의하면서, 이 세상에 깃들이고 살아가는 인간의 정당한 거주행위를 돌아보고 의미를 통찰하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성매매피해여성을 위한 지원사업을 하고 있는 최정은씨(사회복지법인 W-ing 대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빵보다 장미’라면서 발표를 통하여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그리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내면의 힘을 갖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최정은씨는 여성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하면서 자신들이 ‘프로그램백화점’을 하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면서, 여성의 눈과 문화적 감수성으로 인문학적 소양을 키우기 위해 영상워크숍과 치유적 글쓰기, 여자들의 여행 등을 기획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문학 수업을 시작하면서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키워온 지 벌써 3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들은 인문학을 통해 당장의 경제적 소득을 넘어서서 “모두의 마음속에 장미 한 송이씩 심는 것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한상봉/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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