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2일 (연중 제25주일) 루카 16,1-1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영리하게 처신한 집사(執事)’의 비유를 이야기하면서, 재물을 인생의 목적과 같이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에게 충실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오늘 복음 말씀의 결론입니다.

오늘의 비유 이야기에 나오는 집사는 정직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는 주인의 재산을 불의하게 낭비하였습니다. 주인은 그 사실을 알고 집사에게 해임을 통보합니다. 그러자 집사는 약은 기지(機智)를 발휘합니다.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차례로 불러들여, 빚 문서를 위조하여 채무를 줄여주거나 없애줍니다. 그는 그가 해직되었을 때, 그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그는 해임되면서도 배임과 횡령의 죄를 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언급된 주인은 주님으로 번역했어야 합니다. 자기를 속여먹은 집사를 그 주인이 칭찬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이 비유 이야기의 주인공 집사를 칭찬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스어 원문에는 주님과 주인이 같은 단어입니다.

그 동기야 어디에 있든, 그 집사는 빚진 사람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오늘의 비유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만들어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재물은 사람의 욕심을 자극하여 불의한 짓을 하게 할 수도 있지만, 그것으로 이웃에게 좋은 일을 행하여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비유 이야기는 집사의 부정직함을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가 부각시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주인의 재산을 훔치던 집사가 이제는 빚진 사람들에게 베푸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집사는 주인의 재물을 관리합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주인의 재물을 관리하는 집사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물은 본시 우리의 것이 아니고, 관리하라고 맡겨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세상에 살기 위해 필요한 재물입니다. 그 동기야 무엇이든 오늘의 집사는 베풀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을 사람들에게 베풀어서 자기 주위에 기쁨이 발생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네 개의 복음서들 중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이 가르친 청빈에 특별히 주목하였습니다. 재물은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쌓아놓고 자기의 위상이나 높이고, 자기의 안락한 미래를 도모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루카 복음서는 인간이 삶의 보람을 재물에 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루카 복음서 12장(16-21)에 있습니다. 어느 부자가 많은 수확을 올려서, 새 창고까지 지어 재물을 쌓아 두고 이제부터 즐기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하느님은 그날 밤에 그를 데려가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재물만 욕심내어 쌓아놓고, 이제는 즐길 수 있겠다고 안심하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그 이야기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보물을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 앞에 부요한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들인 이웃들에게 베푸는 사람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재물의 위력은 큽니다. 재물은 사람들을 쉽게 노예로 만듭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고, 국민으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된 과거 정치지도자들도 우리는 보았습니다.

재물은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습니다. 재물 때문에 부모와 자식이 불목하고, 부부가 갈라서고, 형제자매가 등을 돌립니다. 서로 믿고 가까이 지내던 친구도 쉽게 배신하게 하는 재물입니다. 그런 불행한 일은 남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람은 재물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히면 하느님도 이웃도 쉽게 잊어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 나타난 진지한 종교들과 사상은 모두 재물을 경계하라고 권합니다. 불교는 무소유(無所有)를 해탈(解脫)의 절대 요건으로 가르칩니다. 유교 이념을 실천하던 옛날 우리의 선비들도 청빈낙도(淸貧樂道)를 제일의 덕목(德目)으로 삼았습니다. 재물은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지, 사람이 그것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들입니다.

예수님도 재물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루카 9,58)는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자유로운 경지에 사셨는지를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재물에 대한 욕심에 얽매인 사람에게는 큰 위험이 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기가 더 쉽습니다”(마르 10,25).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루카 6,20)고도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집사는 불의하게라도 재물로 친구를 만드는 순발력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신 것은 바로 그 점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재물은 ‘불의한 것’이고, 재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은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의하지 않은 다른 재물이 있고, 아주 작지 않은 큰 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재물과 관련된 일은 ‘남의 것’이라고 말하고 ‘너희의 몫’이 따로 있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재물의 욕심에 허덕이면, 그것은 ‘불의한 재물’이며 ‘아주 작은 일’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인 ‘우리의 몫’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재물로써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보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세상 재물에 대한 욕심에 휘말리면, 사람이 속물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도 이웃도 우리의 시선에서 사라집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잠시 살다 가는 생명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재물과 더불어 이 세상에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처신합니다. 재물을 주님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재물이 인간 안에서 요동치면, 인간은 기고만장하고, 허세를 부립니다. 그러다 재물이 떠나가면 그 사람은 살 의욕을 잃습니다. 재물의 노예가 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섬기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속의 재물’로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여 친구를 사귀는 수단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녀가 세상의 ‘작은 일’을 버리고 아버지의 ‘큰일’을 실천하는 자세라는 말씀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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