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식의 삶과 노래]오늘도 삭슬랑은 자란다 3

  

   

나를 제외한 우리 집 식구들은 대부분 매우 건강하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본체력도 좋았겠지만, 외식과 탐식을 삼가는 대신 좋은 먹을거리를 택하여 알맞게 고루 먹는 식습관도 한몫 했다고 여긴다. 병원 신세를 지는 일이 거의 없다보니 가끔씩 코메디 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체질적으로 건강한 아내의 소망은 하얀 천으로 씌워진 병원 침대에 누워 파리한 얼굴로 링거를 한 번 맞아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50대 중반으로 가고 있는 지금까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삭, 이슬, 이랑 이렇게 세 아이를 키우면서도 비슷한 일은 자주 있었다. 누구든 아프면 시선이 집중되기에 아이들은 아프고 싶어 하지만 뜻대로 아프지를 않으니 안타까워한다. 어느 날 오빠 이삭이가 넘어져서 입술이 으깨어져 피가 흐른 채로 들어오자, 할아버지와 삼촌들을 비롯하여 온 가족들이 피를 닦아주고 연고를 바르면서 관심을 보였다. 부러운 눈으로 그걸 바라보던 이슬이가 이렇게 말했다.
“나도 오빠처럼 다쳐서 피나고 싶다.”

그런 일이 아니라도 이슬이는 두 살 터울인 오빠의 거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다 따라했다. 심지어 작아서 못 입게 된 오빠의 내복 아랫도리까지 물려받아 입었다. 앞이 터져 있어도 오빠 것이면 좋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도 오빠처럼 서서 오줌 누고 싶다.”

그런 이슬이도 약한 곳이 있는데 바로 귀, 코, 편도선으로 연결된 이비인후기관이다. 감기가 들면 편도선이 자주 부어서 귀와 코에 염증을 일으키므로 취학 전에 수술을 해서 편도선을 제거하였다. 증상이 많이 나아졌지만 선천적으로 약한 기관이 늘 조바심을 일으키더니, 마침내 열세 살 되던 2001년 여름에 가족여행 중에 탔던 비행기에서 한쪽 고막이 파열되고 말았다. 성장하는 아이들은 스스로 재생되기도 한다고 하여 7년을 기다렸지만 결국 이번 연말에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저것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본인은 내심 즐거운 표정이다.

“드디어 입원이다. 수술을 이삼십 분 만에 끝내버리기만 해 봐. 의사선생님 가만 안 둘 테니까. 최소한 서너 시간은 해야 돼.”
3박4일 입원 동안 친구들은 누구누구를 부를 것인지, 병실에서 함께 놀 친구들은 어떻게 배정할 것인지, 동상이몽이라는 계획을 따로 세우고 있을 동생 이랑이와 그의 친구들은 어떻게 따돌릴 것인지를 열심히 고민하고 있다.  이런저런 아빠의 고민에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정말 웃긴다. 대학생이 저토록 철이 없다니.



문득 몇 년 전의 일이 다시 떠오른다. 학교에만 가면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돌아오는 이슬이를 데리고 가까운 동네 병원에를 갔다. 몇 가지 검사 끝에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하여 대학병원으로 가서 지시대로 혈액내과에 검사를 의뢰했다. 새로운 몇 가지 검사를 다시 한다기에 애써 마음을 진정하면서 의사께 물었다.
“무슨 일일까요? 설마 나쁜 병은 아니지요?”
“글쎄요. 검사가 나와 봐야 알겠는데요.”

나흘간의 시간은 악몽의 연속이었다. 아는 것이 병이라고 했던가. 그동안 심장병 백혈병 환우들을 돌보면서 큰 병원을 자주 드나들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혈액내과인데 검사결과를 봐야 안다면 혹시 위험한 백혈병 같은 것은 아닐까? 어쩐지 세 아이 중 가장 약하다 싶었더니 마침내 이런 어려운 병에 걸리고 말았구나.’라고 생각방정을 떨면서 며칠을 힘들게 보내고 병원으로 갔다. 차마 의사 선생님을 피하고 싶었다.
“빈혈이네요. 철분 결핍이니 철분제를 투여하면 됩니다. 약 받아 가시구요.”

너무 싱겁게 끝나서 기가 막혔다.
“아니, 선생님. 단지 빈혈이에요? 철분은 왜 결핍되었을까요?”
“예전에는 솥과 철냄비 등에 음식을 해먹었기에 철분이 간접적으로 섭취되었는데, 요즘에는 모두 코팅된 걸 쓰니 자칫하면 철분이 결핍되기 쉬워요. 특히나 생리를 하는 성장기 소녀들에게 흔한 증상이지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두어 달 약을 먹였더니 씻은 듯 증상이 없어졌다. 

또 한 번 놀란 것은 일 년 뒤였다. 다시 빈혈이 시작되어 이번에는 좀 더 정밀검사를 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입원을 하게 되었다. 입원이 결정되자 심란한 부모의 마음과는 달리 이슬이는 얼굴이 환해지면서 ‘입원이다!’라고 환호했다. 입원실과 침대를 배정받았고, 간호사가 환자복을 갖다 주었다. ‘와~! 환자복이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라고 하면서 환자복을 품에 안고 입맞춤을 했다. 참으로 철(분)이 없는 아이다. 그러니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볼 수밖에. 우리는 또 며칠 동안 조바심을 쳤는데, 그랬거나 말거나 이슬이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환자생활을 잘 즐겼다. 특별한 증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검사를 하고 그걸 기다리면서 상태를 지켜보는 것이어서, 보호자가 밤을 지킬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도 밤을 지키면서 간호를 하겠다고 자청한 친구가 있었다. 물론 그 친구의 부모께 내가 전화로 양해를 구해야만 했고, 함께 환자복을 입은 채 자고 싶다고 하여 간호사께 부탁하여 따로 환자복 하나를 더 얻어 주었다.

철분 결핍 외에는 다른 증상이 없어서 나흘 만에 퇴원을 하던 날은 동생 이랑이가 함께 따라갔다. 퇴원절차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이슬이와 이랑이가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하듯 말했다.
“아빠. 우리 환자복 가져가서 일주일 후에 갖다 주면 안 돼? 둘이 한 벌씩 입고 이층 침대에 누워서 놀고 싶어”
“그래. 어차피 빨아야 할 옷인데 갖고 가서 좀 더 입고 일주일 후에 병원에 한 번 더 들러야 하니까 그때 아빠가 돌려주면 되겠지 뭐.”

그렇게 분별없는 부탁을 들어주면 버릇이 나빠진다고 한사코 말리는 아내의 말을 무시한 채 나는 아이들의 부탁을 들어주고 말았다. 집에 돌아와 이틀쯤 입고 나서 시시하다고 벗어버렸음은 물론이고, 일주일 후 병원에 갈 때 가져가서 병실 앞에 있는 통에 넣고 오는 것으로써 마무리되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병원 밖으로 한 번 나갔던 옷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한다. 감염문제 때문에 병원내규로 철저히 지켜지는 일이기에 병원측에 협조를 구했더라면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말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아이들의 부탁이기에 들어주었던 일이 후회되지는 않는다. 일생에 한 번으로 족한 추억일 것이기에.

살아오면서 자주 아팠고 또한 몇 차례의 크고 작은 수술 때문에 병원신세를 졌던 나로서는, 무슨 연유가 되었든 간에 병원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다. 가끔씩 병원 앞을 지나가다가 알코올 냄새가 싫어서 멀리 돌아서 간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가난한 형편 속에서도 잘 먹고 잘 자란 건강한 우리 집 아이들의 심정은 나와는 다른가 보다. 오늘도 우리 집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살아가고 있다. 가끔씩은 아프고 싶기도 하고, 가끔씩은 입원하고 싶기도 하면서. 혹독한 불경기를 온몸으로 겪어내는 어른들의 심란함에 아랑곳없이, 기회만 닿으면 입원하고 싶어하는 철없는 아이가 이번 입원을 통해서 철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내심 그걸 기대하지 않는 내 심정은 왜일까? 나도 철분(?)이 결핍된 것은 아닐까?

 



사진 고태환
김정식/가수 겸 작곡가로 생활성가의 개척자이며, 파리국립음악원에서 그레고리안과 지휘법을 공부하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위한 자선음악회와 환경보전과 인권회복을 위한 사회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와 예술가요 및 연주곡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만들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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