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별 이야기]


경기도 광주의 야산 기슭에 자리잡은 작은 교회를 알게 되어 그 곳에서 하루를 보냈다. 건물의 창 너머 비탈진 산등성이에 우뚝우뚝 서서 무소유를 살고 있는 겨울나무들이 수도승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요즘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산문집을 읽었다. 산문집 속 내용 중의 하나는 이렇다.
코엘료가 네덜란드에서 만난 어떤 이가 자신은 바티칸의 간청을 받고 특수부동산을 거래하는 부동산업자라고 소개한다. 그가 바티칸을 위해 일하는 내용은 이러하다. 그리스도교 신자의 수가 교회의 수보다 적은 네덜란드에서 교회가 콘도미니엄이나 나이트클럽 및 술집 심지어 섹스샵으로 팔려나가는 걸 막기 위해, 바티칸에서는 몇몇의 전문 부동산업자들에게 교회가 복지관이나 박물관 등의 공공시설로 매매되게 유도해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교회도 '도도'의 길을 가는가

마침 코엘료의 아내가 화가라서 이 작가는 작은 교회를 하나 매입해보려고 값을 물어보니, 1유로라고 해서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건물을 성전(聖殿)답게 유지해달라는 조항이 들어 있어, 그러자면 관리비가 천문학적인 액수가 들어가는 것이라 거래의 성사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조금씩 내용은 달랐지만 많이 듣던 이야기였다. 이제 유럽에 그 많은 교회들은 미사와 예배를 드리는 기능에서 멀어지고 있나보다. 그 원인을 몇 마디로 잘라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욕망과 그 욕망으로 인한 배반의 쓰라린 감정들이 교회의 흥망성쇠에 배여 있을테니까... .

"도도의 길을 가다(go the way of the dodo)" 는 표현은 곧 사라져갈 것들을 지칭하는 관용어이다. 디지털 카메라의 사용으로 카메라필름이 "도도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하는데 영어문장으로, "Camera film will go the way of the dodo" 라고 표현하면 된다. 멸종된 대표적인 종이 바로 도도새이기 때문에 이런 관용구가 생겨난 모양인데 그림에서 보듯, 도도새는 새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날개가 퇴화되어 날지 못한다고 한다.

인도양의 모리셔스 섬에서 살던 도도새는 아무런 천적이 없는 환경에서 살다보니 도망갈 일이 없었기에 날개가 퇴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모리셔스 섬 주위를 오가던 배의 선원들이 배에 실고 다니던 돼지와 원숭이를 풀어놓자, 이들의 개체수가 늘어나며 도도새는 그들의 먹이로 지구상에서 멸종되고 말았다고 한다. 생존경쟁에 노출되지 않았기에 안일한(?) 생활을 하다 갑자기 들이닥친 적들에 의해 멸종된 것이리라.

교회의 쥐처럼 가난한, 그러나

유럽을 다녀온 지인들의 이야기와 코엘료의 글을 읽으며 내 머리 속에서는 거대한 교회들의 운명이 꼭 도도새가 가는 길을 걷는 것만 같았다.

다른 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야 내가 알 수 없고 알아도 피상적이지만 내가 교회와 멀어진 이유는 교회가 중산층 중심의 시스템으로 바뀌어가며 오만함을 드러내, 가난한 내가 그 안에 앉아 있노라면 주눅이 든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중고등학생 시절 우리는 as poor as church mouse(교회의 쥐처럼 가난한) 숙어도 많이 외웠었다. 영문학 속에는 어김없이 가난한 교구의 가난한 목사의 집이 자주 등장했고 이 집 사람들의 삶을 묘사, 설명하기 위해 이 관용어는 자주 사용됐었다. 분명 교회는 가난을 십자가처럼 품에 안고 살아왔기에 이러한 표현이 굳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만나는 교회의 추락을 살펴보면 지나친 소유로 인한 붕괴가 그 원인이었다.

튜터왕조의 헨리8세(1497-1547)는 영국의 종교개혁을 이끈 절대군주로서 국민국가가 싹트는 시기의 국왕이었다. 당시 영국은 교황청에 금전납부를 해야 했으며 교회와 수도원은 국토의 1/3에 해당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왕권강화를 위해 헨리 8세는 재원을 필요로 했고 왕실만큼이나 세속적으로 부패했던 교회와 수도원을 향해 왕권강화세력은 교회의 권위와 재산을 그들의 소유로 바꿔 놓았다.

중세 가톨릭 교회를 향해 “적그리스도가 다스린다 해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라는 마틴 루터의 격정적인 토로나 세계사에서 듣는 중세교회의 타락상을 보면 개혁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헨리8세의 개혁은 종교적 의미와 거리가 멀다. 다만 교회의 권위가 추락하는 근원에 토지소유라는 인간의 본원적 욕망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볼 수 있으며 교회의 리더들이 이러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이 세속적 세력은 교회의 수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서원은 지금 도둑의 소굴이 되어

이러한 현상은 구한말 대원군이 실시했던 서원의 철폐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서원은 우리나라 선유(先儒)를 제사하고 그 가르침을 이어받고자 하는 사설 교육기관으로 이를테면 유교적 수도원이라 할 수 있는데 대원군 시절에 들어서면 한 고을에 10 여개의 서원이 난립하는가 하면, 한 인물을 향해 10 여개의 서원에서 동시에 배향되는 일도 있었다. (사액)서원은 면세토지와 노비를 하사받는 데다, 고을 평민들의 노역과 재물을 침탈할 수 있는 권위를 지니고 있었고 또한 평민들은 군역을 피하기 위해 서원의 노비로 등록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우리나라 서원은 지금에는 도둑의 소굴이 됨에 있어서랴." 라고 분노를 터트리며 서원의 토지를 몰수하여 왕권강화를 위한 재정으로 삼았다.

글쎄, 언젠가 as rich as church (mouse) 라는 표현이 관용구로 자리잡으면 교회는 역사적 사건에서 보듯 그 위세의 추락으로 새로운 길을 준비할지 도도새처럼 멸종의 길을 걸을 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부요함 속에는 낱낱의 존재와 사물이 효용체감의 법칙에 따라 가치가 하락하는 부패의 기미가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고 가난의 자리가 꼭 본래의 가치를 살려내는 장소만도 아닌 것 같다. 오도된 가치가 극대점을 향해 나아가거나 존재의 가치가 소멸하는 슬픔의 자리이기도 하다. 어떻든 균형을 잃은 가치측정은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정서적 불안정을 드러낸다.

겨울나무들이 서 있는 산 아래 교회는 작고 따뜻하다. 이 길 위에서, 산등성이의 나무들과 더불어 대림절을 보내는 지금, 고요하다. 산 위로 펼쳐진 검푸른 하늘에 가득 찬 별들과 함께 성탄전야를 보낼 생각을 하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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