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목걸이 하자- 박춘식 주머니에 지갑 안에 넣지 말고 장롱이나 베갯맡에 두지 말자 사랑을 책갈피에 끼우지 말고 목에 걸고 다니자 바라보면 반짝이는 별이 되고 포옹하면 불꽃으로 피어나는 이중주 선율에 드맑은 사랑을 목에 걸고 다니자 마음을 하나로 포갬포갬 하여 천지인의 하모니를 보여주고 하느님의 향기를 나누어주는 사랑, 목걸이 하자
겨울 그리스도-김남조 오늘은 눈 덮인 산야를 거닐으시네 눈같이 흰 옷 입으시고 눈보다 더욱 흰 맨발이시네 그 옛날 물 위를 걸으시던 강줄기도 얼어 유리와 수정의 빙판 바늘 꽂히는 냉기의 그 위를 거닐으시네 희디흰 맨발이시네 울고 싶어라 머리칼도 곤두서는 율연한 추위에 물과 바다의 깊은 곳으로부터 보혈을 섞어 빚은 새봄의 혈액을 한없이 한없이 자아올리시는 설
스스로 묻는다- 박춘식 내가 나에게 묻는다 너는 무엇이냐 어디서 길이 시작되는지 여정(旅程)의 끝은 어딘지 생각해 보았는가 지금 가고 있는 길목에서 풀꽃이 반겨줄까 그러고 또 이 천 년 전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인가* 물어보았는데 나는 참나무 낙타 장승 강물 바위에게 진리를 물어보았는가, 눈동자 뜨겁도록 찾아보았는가 생명의 소리를 들어 보았는지 성
듣고 싶은 뉴스- 박춘식 이천십일년십이월육일화요일저녁/벤츠여자검사조사받는데그여자임신중이라고/강남룸싸롱접대의혹받고있다는최모의원/횡령비자금의혹경제인검찰출두/전쟁나면즉시미국으로도망갈대통령이라는느낌든다는노교수의말씀/이혼요구한아내커피숍에차몰고돌진/무슨무슨당을망가뜨린사람으로이이이박홍오명거론한국회의원등등등///어둑침침한소식꾸엑꾸엑구역질뉴스가진행되다가, 느닷없는 아나운서
새해기도 -박춘식 분(分) 분으로 쪼개지는 새벽 아침 가방이 초침(秒針)에 끌려가더라도 비눗방울 보득보득 손목까지 씻는 짬을 즐기며 일과 일 틈새 하늘 잠깐 바라보는 새해가 되기를 177밀리미터 정확도(正確度)를 가끔은 한 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고 강력 접착제로도 이어지지 않는 단어들이 설익은 시(詩)가 되어 검붉은 상처를 덮어 주는 한 해가 되기를
크리스마스 이브_ 이정우 엄동의 밤하늘 아래서 도시빈민들과 막노동꾼들이 소줏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 이 세상 후미진 들녘 끝 어디선가 배고픈 목동들과 양떼들이 잠들지 못하고 있을 때, 저마다 아픈 지상의 목숨들이 어릴 적 어머니의 자장가 같은 사랑을 외로운 가슴에 안고 있을 때, 바로 그날 밤 … 이 슬픔과 욕망과 애환의 땅 위에 천사들은 흰
대림촛불 기도- 박춘식 온 세상이 짙은 어둠에 눌려 있습니다 암흑의 벽을 더듬거리는 저에게 빛살 한 가닥 주소서, 대림촛불 하나로 제가 지은 죄, 하 많은 죄가 망각의 어두운 휘장에 가리어져서 아무도 모르리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이 우둔함을 깨우쳐 주소서, 두 개의 촛불로 사막 순례자 되어 따가운 모래 언덕 검불 위에 가칠가칠 꿇어앉아 참회하면서 줄곧 구
죄송합니다- 정호승 아직 숟가락을 들고 있어서 죄송합니다 도대체 뭘 얻어먹을 게 있다고 해는 지는데 숟가락을 들고 하루종일 지하철을 헤매고 다녀서 죄송합니다 살얼음 낀 한강에 떠다니는 청둥오리들 우두커니 바라보아서 죄송합니다 한강대교 위에서 하늘로 힘껏 던진 돌멩이들 별이 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믿음이 없으면서도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고 그분의 신발에 입
하심(下心) 4 -박춘식 그분이 말씀하신다 __ 너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라 __ 맨바닥에 말씀 따라 찬찬히 내려놓는다 억센 머리 목덜미 어깨 팔 가슴 엉덩이 다리 몽땅 내려놓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__ 이제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연신 불뚝 거리는 마음을 맨바닥에 놓고 다음 차례는 영혼이려니 어떡하나 영혼이면 마지막인데 끝장인데 __ 너의 영혼은 내가 항
대림초_ 박춘식 감감한 그 옛날 당신과 헤어진 다음 큰 홍수에 집을 버리기도 하고 높은 탑 위에서 깃발 흔들기도 하고 발가벗고 까불다가 유황불 벼락맞기도 하고 구름기둥 불기둥 따르기도 하고 ‥‥ 이제 당신이 하늘 사랑으로 저에게 오신다 하니 누굴 보내지 않고 기꺼이 몸소 오신다고 하니 ‥‥ 촛불을 세우고 문을 열어둡니다 당신 오시는 길에 어둠을 걷어내려고
응 ‥‥ -박춘식 가장 낮은 모음은 이고 모나지 않게 순한 자음은 이라면 글자 중에 제일 겸손한 글자는 가 된다 숨 가쁜 호흡으로 이 땅에 제일 겸손한 글자는 이다, 하고 백두대간 능선에 올라가 고함치려 했는데, 전날 밤중에 천사가 다급히 내려와 글자를
세 번째 송년 _김남조 (그의 영혼을 주께 맡기나이다) 이 간명한 한 마디를 나는 말할 수 없어라 (나의 영혼을 주께 맡기나이다)라는 내 임종의 말과 너무나도 동질동의어인 이 말 (그의 영혼을 주께 맡기나이다) 이 한 마디가 세상을 떠난 이를 위해 가장 좋은 기도된다는데 만경창파로 흐르는 세월이 세 번째 송년이라 글씨 쓰는 이 날까지도 나에겐 왜 이리 어려
11월이 오면- 박춘식 산기슭 은행나무가 옷을 벗는다 노랗게 더 넓어지고 노랗게 더 허전해지고 잎잎으로 가려졌던 네가 보이는구나 잔디는 아직 덜 익어서 파릇파릇한데 봄부터 너를 잊고 있었는데 안 보인다고 생각도 안 보였는데 이제 네가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누워있는 네 집을 보면서 11월 한 달 동안, 연이어 차가운 겨울에도 너를 위해 매일
잠토함(潛土艦)- 박춘식 시인의 상상력은 묘향산을 낙동강 곁으로 옮길 수 있다 고, 시력 높은 시인들이 말하기에 나는 며칠 전 특수 유리로 잠토함(潛土艦)을 만들었다 속도는 느리지만 어둑어둑 많은 것들이 보인다 뜨거운 바위산 밑에 강물이 훈훈하게 흐르고 있는 토심(土深) 2,285미터의 평온함 얼마 전 잠수함에서 본 큰 하심(下心)은 집채만 하였지만 잠토함
돌멩이-정호승 아침마다 단단한 돌멩이 하나 손에 쥐고 길을 걸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쳐라 누가 또 고요히 말없이 소리치면 내가 가장 먼저 힘껏 돌을 던지려고 늘 돌멩이 하나 손에 꽉 쥐고 길을 걸었다 어느 날 돌멩이가 멀리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거리에 있는 돌멩이란 돌멩이는 모두 데리고 나를 향해 날아와 나는 얼른 돌멩
마음 노래 _시편 38편-박춘식 주님, 불길 같은 노여움으로 죄 많은 저를 꾸짖지 마소서 벌하지 마소서 뜨거운 화살이 주님의 심판처럼 제 몸에 가득 들어와 피부와 살을 찢어놓고 심한 고통으로 뼈마디까지 떨게 합니다 주님 앞에서 범한 죄악들이 저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죄의 상처들이 꿈질거리며 온몸으로 번져 급기야 심장을 향하여 밀려오고 있습니다 제 얼굴을 바닥
겸손 3 _ 박춘식 산이 나에게 산기슭처럼 낮추라 이르네 길이 나에게 길바닥이 되라고 이르네 꽃이 나에게 꽃받침되어 눈에 띄지 말라 이르네 들판이 나에게 흙처럼 살라 이르네 나무가 나에게 뿌리처럼 되라고 이르네 새들이 나에게 바람 나직이 숨 쉬라 이르네 하늘이 나에게 지천(地天)의 소리를 품어라 이르네 오늘 안에 있는 지금 오늘 밖에 있는 지금 나를 흔들며
기도-구상 저들은 저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도 이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눈먼 싸움에서 우리를 건져 주소서. 두 이레 강아지 눈만큼이라도 마음의 눈을 뜨게 하소서. 한국대표시인101인선집, 구상, 문학사상사, 193쪽 기도는 신앙인의 필수과목입니다. 기도는 반드시 점수를 받아야 하는 신앙인에게는 절대평가 과목입니
순교는-박춘식 맹물을 밥으로 넘기는 어린 사랑에게 자기 도시락을 조용히 내어주는 스승의 손길 그리고 다리 없는 사랑과 함께 공부하고 산과 들판으로 업고 다니며 노는 친구 이야기 지하철 레일에 엎어진 사랑을 구하고 미처 올라오지 못하여 숨을 멈췄다는 창창한 대학생 그리고 물에 잠긴 어린 사랑을 건져 보트에 태우고 다른 사랑을 연이어 구하려다 수장된 아저씨 이
오늘의 순교-홍윤숙 선조들이 흘린 핏값으로 이 시대는 박해도 순교도 없는 대명천지 사람들은 자랑하듯 당신을 목에 걸고 다닙니다 시련이 없고 박해가 없으니 불타는 투지도 정열도 없고 안일과 나태, 허욕과 타락으로 신앙은 조금씩 병들어 가고 …… 이 시대의 적은 밖에 있지 않고 자기 안에 있으니 그 보이지 않는 적, 곧 자기를 죽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