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침묵하는 것이 그들과 말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생각이 나에게 계속 떠오른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 그리고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주 우리가 진정으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나에게 준다.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수 없이 많은 것들을 나누는 것은 자주 가까움 보다 거리를 더 만들어준다. 말들은 마음을 한데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서가 세례자 요한을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이 복음서는 요한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있었고, 요한이 그들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증언하였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가 살아 돌아온 것도 아니며, 예언자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
티토스 원장이 말했다, “순례란 우리의 혀를 다스려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순례하는 것은 침묵하는 것”이라는 표현은 침묵이 미래 세계에 대한 최상의 예견이라는 사막의 교부들의 확신을 말해준다. 침묵에 관한 가장 빈번한 논쟁은 말이 단지 죄로 이끈다는 점이다. 이것은 야고보 사도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표현하고
하심(下心) 4 -박춘식 그분이 말씀하신다 __ 너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라 __ 맨바닥에 말씀 따라 찬찬히 내려놓는다 억센 머리 목덜미 어깨 팔 가슴 엉덩이 다리 몽땅 내려놓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__ 이제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연신 불뚝 거리는 마음을 맨바닥에 놓고 다음 차례는 영혼이려니 어떡하나 영혼이면 마지막인데 끝장인데 __ 너의 영혼은 내가 항
나의 말까지 포함하여 말들은 그 창의적인 힘을 잃고 있다. 말들의 한없는 증가는 말들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하고 자주 “그건 말에 불과해”라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6년, 12년, 18년 그리고 때로 24년 동안 말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자주 “그건 단지 말에 불과할 뿐이야”라는 느낌을 경험한
오 주님 예수여, 아버지께 드리는 당신의 말씀은 당신의 침묵으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이 침묵 속으로 저를 이끄소서. 그래서 제 말이 당신의 이름으로 말해지고 열매를 맺게 해 주십시오. 침묵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입이 침묵하기가 어렵고 제 마음이 침묵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제 안에서 저는 너무나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과, 친구들과 적들, 지지자들, 반
“나의 마음의 기도는 무엇인가?”라는 개인적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가장 개인적인 기도를 어떻게 발견할 것인지 알아야한다. 고유의 역사, 배경, 성격, 영감 그리고 행동할 자유를 가지고 있는 개인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과의 친밀함 속으로 들어가도록 초대되었는지 발견하기 위하여 어디를 바라보며 무엇을 하고 누
하느님 나라에 우리 마음을 두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잠자리에 누워 많은 걱정 때문에 잠들 수 없을 때, 잘못 될 수도 있는 모든 것들에 몰두하며 정신 없이 일할 때, 죽어가는 친구에 대한 염려로 마음을 잡을 수 없을 때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 나라에 내 마음을 기울인다? 좋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한
1.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복음서를 이해하려면 통상적으로는 네 복음서를 쓴 네분의 복음사가와 그들의 작품인 네 복음서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복음서가 완성되는데 네분의 복음사가의 공헌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념해야 할 바는 복음서가 완성되는데 있어서 복음사가는 마지막 단계인 세번째 단계의 기록자일 뿐이다. 네 분의 복음사가가 복음서를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서의 시작 부분입니다. 이 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복음서는 이사야서를 인용한다고 말하면서, 구약성서의 탈출기(23,20)와 말라기서(3,1)와 이사야서(40,3)를 한 구절씩 차례로 인용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는 묘사는 열왕기 하권(
참으로 모든 것은 다 기도이다. 그러나 오직 깊히 투신한 사명을 통해서만 모든 것이 우리에게 참으로 기도가 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산티아고의 교회에서 일요일 오후 성찬례를 봉헌하는 동안 최고로 뚜렷하게 보여졌다. 죤 베시 신부는 하얀 장백의를 입고 제단 뒤에 섰고 밝고 다양한 색깔의 영대는 마을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죤 앞에는 2천명이 넘는 여성들,
자주 우리는 미래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 우리는, “다음해에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지금부터 5년 혹은 10년 후에 나는 어디 있을까!”하고 묻는다. 이런 질문들에는 답이 없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그저 그 다음 발걸음을 볼 수 있는 만큼의 빛을 받을 따름이다. 즉 다가오는 시간대나 다음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뿐이다
대림초_ 박춘식 감감한 그 옛날 당신과 헤어진 다음 큰 홍수에 집을 버리기도 하고 높은 탑 위에서 깃발 흔들기도 하고 발가벗고 까불다가 유황불 벼락맞기도 하고 구름기둥 불기둥 따르기도 하고 ‥‥ 이제 당신이 하늘 사랑으로 저에게 오신다 하니 누굴 보내지 않고 기꺼이 몸소 오신다고 하니 ‥‥ 촛불을 세우고 문을 열어둡니다 당신 오시는 길에 어둠을 걷어내려고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하고 예수는 외친다,“...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마르꼬 10,23). 그리고 우리에게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하여 그분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오 16,24
두려움, 미움 그리고 폭력에 점철된 세계 한 가운데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으며 또 그것에 의해 어떻게 멸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예수가 아버지께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그분은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내가 아버지께 원하는 것은 그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서 지켜주시는 일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집”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들은 구약신약에 자주 등장한다. 시편의 노래들은 하느님의 집에 살고, 하느님의 날개아래 피난처를 구하며,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보호를 받고 싶은 염원으로 가득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자리, 하느님의 놀라운 장막, 하느님의 굳건한 피난처를 찬미한다. 아마도 “하느님의 집에 거하는 것&rdq
단풍이 아름답더니 벌써 낙엽 되어 떨어져 발에 밟히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절(待臨節)이 시작하는 날입니다. 한 해가 기울고, 또 한 해의 시작이 가까웠다는 것을 예고하는 계절입니다. 대림절은 글자 그대로 임할 것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성탄축일이 가까워옵니다. 또한 멀리는 우리 삶의 종말도 다가오고 있음을 생각하는
거의 일생 내내 나는 “너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자매를 나 때문에 떠나라”는 예수의 말을 정말 문자 그대로 해석해 왔다. 가족을 떠나고 결혼을 하지 않으며,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먼 나라로 선교를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직도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그런 떠남을 단행하는 사람들을 보고 격려되고 영감을 받고 있지만, 나이가 들어가
[아침햇발] 대림절을 목전에 두고 하루 하루 읽으며 묵상할만한 글을 연재하려고 합니다. 1998년에 로버트 에이 죠나스가 헨리 나웬의 글을 편집한 (Orbis, 1998)인데, 2004년에 에서 번역한 것을 한현 선생의 허락을 받아 게재하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 '하느님 안에 잠겨' 그분과 더불어 동행
1. 네 복음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어떤 사람이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친척을 만나게 된다면 그 친척이 누구이며,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알아보게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을 하며, 어디에 살고, 결혼은 했는지, 했다면 누구와 했고, 자녀는 얼마나 두었는지, 성격은 어떻고 기호나 취미는 무엇인지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