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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성이 담긴 봉헌에서 기쁨을/연중 제34주간 월요일

닉네임
늘벗
등록일
2019-11-25 05:10:44
조회수
890
첨부파일
 5.jpg (235737 Byte)

어떤 빈곤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내용이다. 부자들이 넉넉한 데서 얼마씩 예물로 바쳤지만, 가난한 여인은 동전 두 닢만을 헌금함에 넣었다. 그런데도 이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바쳤다고 칭찬하신다. 우리는 의미 있는 날에 선물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정성이 많이 들어간 선물이 더 기쁘고 고맙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액수보다도 마음이다. 어떤 마음으로 주님께 선물을 드려야 할까? 기꺼이 드려야만 한다. 체면이나 과시하려면 그 가치는 절감될 게고 반면, 아무런 대가도 없이 우러러 나온 헌금은 그 가치가 배가되기도.

그리고 다소의 희생이 따르기도 한다. 부자는 자신들 여유분 중에서 일부분일 테지만, 가난한 이는 모두를 내는 걸게다. 이러니 부자는 헌금을 많이 하여도 생활에는 그다지 지장이 없는 반면, 끼니 걱정부터 해야 하는 이는 당장 걱정이 될 수도. 그러니 가난한 이의 헌금이 더 가치가 있다. 교회에서 헌금 내는 것은 적선이 아닌 하느님께 자신의 일부를 바치는 봉헌이니까.

사실 우리가 남을 돕거나 봉헌할 때에 세속의 마음으로는 얼마나 많이 재고 계산하는지? 기껏 그 하잘 것 없는 체면세우거나 생색내려고, 또 뒤에 자신에게 돌아올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따지는 게 아닌지? 아름다운 헌금은 주어진 삶을 봉헌하는 거다. 당당하게 해야 된다. 그래야 정성이 될 터이니까. 액수보다 정성이 담겨야 ‘참된 헌금’이 될 게다. 그러니 봉헌에 대해 솔직히 생각해 보자. 물질이든 시간이든 간에 봉헌은 주님께 바치는 것으로 최우선을 삼자.

그냥 쓰고 남은 돈이나 시간을 바친다면, 그 가치는 떨어질 게다. 가난한 과부는 쓰고 남은 것을 봉헌한 게 아닌, 정성을 다해 바치는 걸 최우선으로 삼았다. 그래서 비록 적었지만, 하느님께는 부유한 그 어떤 이의 그것보다도 더 소중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삶을 그분께서 보살피신다는 강한 믿음이 있었던 거다. 그 과부가 헌금함에 모두 넣은 뒤의 손은, 빈 털털이였다.

그러나 그 빈손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하느님께 바친 손이었다. 비록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분께 바친 그 빈손이야말로 가장 거룩하였다. 그 손을 그분 눈으로 보면 가장 풍성한 부(富)가 담겨져 있었을 게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그녀를 칭찬하신 것은, 비단 봉헌 액수가 상대적으로 부자보다 더 높았기 때문만이 결코 아니다. 그분께서는 바친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니고,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의탁을 드러내려는 그 여인의 행위를 두고 칭찬하신 것이리라.

이렇게 먹고픈 것, 입고 싶은 걸 참고 절약하여 바친다면, 그 헌금이야말로 훨씬 가치가 있을 게다. 그러니 우리는 과연 어떤 봉헌을 하는지를 성찰해보자. 아무리 많은 헌금도 정성이 없다면 소용이 없다. 중요한 건 그 정성이다. 그러니 늘 삶을 되돌아보자. 재물을 더 많이 쌓는다고 평화가 찾아오는 것만이 아니니까. 도리어 더 많은 재물을 쌓으려는 그 욕심으로 인해 대게는 우리를 근심에 빠트릴 게다. 더 나아가 우리를 죄짓게 하며, 하느님을 멀리하게 할 수도.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결단코 함께 섬길 수 없단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가난한 이가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거다. 모두가 가난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보다 재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는 거다. 하찮은 일에도 정성을 쏟으면 기쁨이 안긴다. 주님께서는 그 정성을 대단히 눈여겨보신다.

작성일:2019-11-25 05:10:44 183.104.33.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