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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장 작은 이야말로 가장 큰 이/연중 제26주간 월요일

닉네임
늘벗
등록일
2019-09-30 04:12:47
조회수
702
첨부파일
 17.jpg (460928 Byte)

우리나라에는 여러 종교가 혼재하고 타 종교관은 어쩌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마저 옹졸하게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분을 그런 편협한 생각이 아닌, 모든 걸 품는 큰마음으로 본다. 큰 건 작은 걸 담기에 그렇다. 예수님 오신 이유는 능력 드러냄이 아닌 우리의 구원이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하신다. 가장 작은 이가 가장 겸손한 이다. 작은 이를 받아들이면, 하느님도 받아들인다. 그래서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라.”라고 하셨다.

깊은 계곡이 물을 받아들이듯 깊은 겸손이 모든 이를 포용할 수 있는 힘이다. 교만하면 죄를 짓고 그 죄책감을 무마하려고 다른 이를 심판한다.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이라도 받아들여야 한단다. 권력 있는 정치인, 돈 많은 이 곁에 많은 이가 모인단다. 반면 힘없는 순진한 이, 돈 없는 이 주위엔 모여드는 이가 별로라나. 그들은 작은 이이기에 이로울 게 없기 때문일 게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야말로 가장 큰 이다.’라신다. 어린이는 사회의 가장 작은 약자였기에 그들을 가까이에서 껴안아야만 보호할 수 있다. 우리는 연약한 어린이를 제대로 그리고 진심으로 대해 주어야 한다. 믿는 이의 공동체는 모두가 평등하고 소중하다는 걸 스스로 깨닫는다. 어쩜 모든 이들은 저마다 내노라 행세하고픈 욕망을 가진다. 그러나 주님의 공동체는 이런 속물적인 것들을 과감히 털어 버려야 할게다. 그래야만 주님 따라 나설 수가 있다.

사실 힘 있는 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독재주의적인 발상에는 과감히 저항할 수 있는 ‘신앙적 용기’가 실은 필요하리라. 우리가 가진 욕망 중 버릴 수 없는 것, 모든 이 내면에서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은 권력일 게다. 그러니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이냐?”하고 다투었다는 것은 어쩜 자연스럽다. 예수님께서는 이 권력 욕심 극복 방법을 알려 주신다. 어린이의 단순함이리라.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가치는 지상의 가치와 매우 다르단다. 하늘 나라의 권력은 인간의 속된 계산법을 넘어선다. 그래서 가난과 겸손 속에 자리 잡는 게 하늘 나라가 지닌 권력이라나. 큰 이 되고자 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 축에도 들 수 없음을 꼭 명심하자. 그분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이야말로 가장 큰 이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꼭 새겨 두어야할 것은, 가장 작은 이는 자기 자신을 내세우거나 자기가 하는 일을 자랑 삼아 하는 그런 이가 아닌, 남을 위하여 봉사하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겸허한 자세로 일하는 이를 말하리라. 하느님의 일을 한다면서도 우리는 쉽게 사기를 치곤 한다. 우리가 마련한 행사보다 다른 이의 것이 더 성공을 거두게 되면, 마음 한구석 어디 꼭 불편해지기도 하리라. 하느님 일을 하려면 사심 없이 오직 하느님의 그 영광만을 바라봐야 한다.

둘러보면 우리 주위에는 말없이 자기 할 일만 수행하는 이는 어디에나 있다. 어떤 단체든 내색하지 않는 이는 있기 마련이다.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이다.” 눈앞에만 매달리다보면 아마도 멀리 보지 못하게 되리라. 얕은 강이기에 소리를 내며 흐르지만, 깊은 강은 언제나 조용히 흐른다. 속 깊은 이는 깊은 강 닮은 이일 게다. 이 땅에 그런 지도자가 많아져야만 한다. 가장 작은 이야말로 가장 큰 이라는 예수님의 그 말씀을, 꼭 깊이 되새기자.

작성일:2019-09-30 04:12:47 183.104.33.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