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에 실린 ‘역사적 사실’과 ‘신학적 서술’

[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10]

2013-07-04     서공석

유년복음(幼年福音)

마태오 복음서(1-2장)와 루카 복음서(1-2장)가 전하는, 소위 유년복음이라는 것도 전기적(傳記的) 성격을 전혀 지니지 않는다(서공석, <예수, 하느님, 교회>, 분도출판사, 2001, 38~41쪽 참조). 예수의 공적(公的) 활동 이전의 이야기를 구약성서의 인물들, 특히 모세의 이야기를 본보기로 하여 서술한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가 예수는 구약성서를 완성시키는 인물이라는 그들의 믿음을 담아 기록한 신학적 작품이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들은 사실화(史實化)해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신앙적 의미, 곧 예수에 대한 초기 신앙공동체의 신앙을 해석하여 기록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가 세례 받은 사실

▲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성 요한 세례자’,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의 작품, 1655년
예수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아야 한다. 예수는 일시 세례자 요한의 세례 운동에 가담하였던 분이다. 따라서 그 사실이 초기 신앙공동체의 복음 선포에 혼선을 빚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각 복음서들은 세례자 요한에 대해 자리매김을 한다. 요한은 “예수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는”(마르, 루카, 요한) 인물이고,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도 없는”(마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복음서들이 기록될 당시 요한의 제자들도 세례 운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요한에 대한 복음서들의 이런 자리매김은 필요하였던 것이다.

루카 복음서는 예수가 세례 받은 사실을 말하면서도,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 그 복음서는 예수의 출현을 말하기 전에 요한을 감옥에 넣어버렸다(3,20). 요한 복음서도 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들을 하고 있다. 초기 신앙공동체들이 예수가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사실을 그렇게 부담스러워 하는 것을 보면, 예수가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은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에 관해 증언하여 자기로 말미암아 모두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빛이 아니었으며 다만 빛에 대하여 증언하려 했을 따름이다. (요한 1,6-8)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관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파견하여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묻게 하였을 때, 그는 고백하며 부인하지 않았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하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그러면 누구요? 당신이 엘리야요?” 하고 묻자 그는 또 “아니오.” 하였다. “당신은 그 예언자요?” 하고 묻자 다시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기를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 주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오?” 하였다. 요한이 말하였다.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나는 ‘주님의 길을 바르게 하라’고 광야에서 부르짖는 이의 소리요.” (요한 1,19-23)

그 후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은 유대 땅으로 갔다. 그분은 그들과 함께 거기에 머무시며 세례를 베푸셨다. 한편 요한도 살렘에서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다. 거기에는 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찾아와서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아직 감옥에 갇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과 어떤 유대인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에게 가서 “랍비,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당신과 함께 있었고 또 당신이 증언한 바 있는 그분이 이젠 세례를 베푸는데 모두 그분에게로 가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당신들 자신이 나에게 증언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단지 그분에 앞서 파견되었을 뿐이오.’ 한 사실을 말입니다. 신부를 얻는 이는 신랑입니다. 그러나 신랑의 친구도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합니다. 내 기쁨도 그렇게 벅찹니다. 그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 (요한 3,22-30)

죄인과 세리들과 어울린 예수

예수가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렸다는 것도 사실로 보아야 한다. 예수가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려 음식을 든다고 유대교 기득권자들. 곧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분을 비난한 사실을 복음서(마르 2,16)는 전하고 있다. 예수가 안식일 계명을 위반한다(마르 2,23)는 것도 복음서에 자주 나오는 비난이다. 예수가 유대인들이 지키던 정결례법을 폐기하였다(마르 7,1)는 말도 있다.

이런 비난의 말들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확실한 증언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평가는 “보아라,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로구나”(마태 11,19)라는 것이었다. 이런 말들은 모두 유대인으로 구성된 초기 신앙공동체에서 예수에게 불리하고 불명예스러운 증언들이기에 우리는 그것들을 역사적 사실로 보아야 한다.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보인다. 일부 사람들에게 예수는 감탄스런 예언자였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과 경건한 유대인들의 눈에는 기성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거짓 예언자였다. 하느님이 죄인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정의에 근본적으로 반대된다고 유대인들은 생각하였다. 그래서 예수는 처형(處刑)에 이르게 된다. 예수의 설교 행각이 일부 사람들에게 성공을 거두지 않았다면, 그분을 죽이기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예수가 폭력에 의해 생명을 잃은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과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들 양심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 필요한 일이었다. 그들의 양심에 따르면 하느님은 율법을 잘 지키는 의인에게 상을 주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에게는 벌을 주어야 한다. 예수는 그들의 눈에 거짓 예언자로 보였다. 그래서 예수는 처형되었다. 구약성서 신명기는 말한다. “내가 말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은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가 있으면, 그 예언자는 죽어야 한다.”(18,20)

악을 사랑으로 극복한다고 믿은 예수

예수는 악은 사랑으로만 극복된다고 믿었다. 예수는 악에 대해 악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악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재물, 신분, 지위, 권력 등의 힘을 예수는 빌리지 않았다. 예수는 평소에 입신(立身), 보신(保身), 양명(揚名)을 찾지 않았다.

예수는 제한 없는 사랑, 죽음에 이르는 사랑을 가르쳤고, 그것을 실천하였다. 요한은 그의 서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예수는 금욕, 고행, 은둔, 출가 등을 장려하지 않았고,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살았다. 그분은 세상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그분은 사마리아 사람이나 이교도들에 대해서도 배타적이 아니었다. 정통 신앙을 정확하게 고백하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았고, 종교의식에 참여하고 의무를 다 하였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여인들에 대해서도 그 시대 사람들과는 달리 개방적이었다(루카 8,2-3 참조).

예수는 병자와 죄인들도 하느님이 버리지 않으신다고 가르쳤고, 변두리 인생들과 함께 어울렸지만, 그렇다고 부자와 권력자들을 미워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예수는 어떤 조직적 계획이나 전략에 따라 활동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어떤 깨달음이 있을 때마다 실천한 분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예수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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