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이전부터 있었던 하느님의 구원
[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7]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일부도 아니고, 우리가 상상하여 생각할 수 있는 분도 아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하는 모든 인간 해방 운동의 기원으로 그 운동의 한가운데에 살아 계신다. 그러나 역사 안에 일어난 어떤 인간 해방 사건도 그분을 그런 분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한 이집트에서의 해방 사건이나, 예수가 실천한 해방도, 하느님을 그런 분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하느님이라는 단어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사람을 희생시키는 자들이 남용하였다.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난 유럽 중세의 십자군, 교회 안에 계속 있어온 파문 관행, 유럽 중세의 종교재판과 그 후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행된 많은 횡포, 비그리스도인에 대한 교회의 비관용 등은 하느님과도, 예수 그리스도와도 무관한 일이었다. 현재도 교회 안에는 성소(聖召)라는 단어로 포장된 각종 인간 횡포들이 있다.
구원 체험은 인간의 실천을 통해 이뤄진다
인간을 소중히 생각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간 해방 역사의 근본과 원천으로 살아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우주 공간의 먼 어느 곳에 어떤 유성군(流星群)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과 전혀 다르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생명을 주신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각자 태어난 역사 과정의 현장에서 투신(投身)하는 모든 사람들 안에 구원하시는 하느님이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여건이 어떤 것이든,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지 않는 경우는 없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와 어울린다고 유대인들로부터 비난받은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하느님은 그런 사람들과도 함께 계신다고 예수님은 확신하셨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도 의미를 발견한다. 이 말은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흔히는 하느님의 뜻이라는 미명하에, 인간의 욕심, 야망, 체념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구체적인 어떤 상황에서 하느님의 뜻이라고 강요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아무 의미도 보이지 않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 신(神)을 만드는 행위이다.
(*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사형수 리샤르에게 목사, 자선가와 귀부인들은 “오늘이 네 일생을 통해 가장 복된 날이지”, “주님의 품에서 죽어라, 너에게 주님의 은총이 내렸으니까!”라고 말한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일을 정당화하는 거짓 신을 말하고 있다. 사적(私的) 계시를 주장하는 이들, 인간의 인과응보 원리에 준한 하느님을 상상하는, 열심하다는 신자들의 독선적 언행 등이 거짓 신을 만들고 있다.)
하느님의 구원적 현존은 반드시 우리가 체험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각(自覺) 이전의 일이다. (* <장자(莊子)>라는 책에 어미 물고기와 새끼 물고기의 대화가 있다. 새끼 물고기가 돌아다니다 어미 물고기에게 돌아와 묻는다. “엄마, 물이 있다는데 어디 있어요?” 엄마 물고기는 말한다. “우리가 물 안에 있단다.” 새끼 물고기는 다시 묻는다. “그런데 왜 물이 보이지 않아요?” 저자는 설명한다. 도(道)도 물과 같아서 우리가 도 안에 있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하느님의 구원적 일하심을 종교적 영역 안으로 제한할 수도 없다. 구원의 역사를 종교사 혹은 유대-그리스도교 역사로 한정할 수도 없다. 세상의 역사 전체가 벌써 창조하고 해방하시는 하느님의 돌보심 하에 있다. 구원과 비구원을 말할 수 있는 첫 장소는 ‘비종교적 일반 역사’의 현장이다.
구원적 하느님의 현존은 하나의 제안이고 베푸심이다. 따라서 그것은 사람들이 자각하고 동의하여 수용한 현존이 아직은 아니다. 아무도 본인의 뜻과 관계없이 구원되지는 않는다. 구원을 체험하는 것은 그 구원을 인간이 수용하고, 그것에 준한 실천을 하면서 가능한 일이다. 이 실천이 있을 때만, 인간은 구원에 대해 깨달을 수 있다. 구원과 구원에 대한 깨달음은 동일하지 않지만, 그 둘을 분리할 수도 없다. 신앙은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이다.
종교나 교회는 이차적이다
교리, 전례(예배), 공동체, 이 세 가지는 모든 종교들이 중시하는 세 가지 요소이다. 그러나 종교들은 구원과 종교를 동일시한다. 그것은 구원의 실재가 이 세상 안에 주어졌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이다.
종교나 교회가 중요하지 않다. 인류 역사 안에 주어진 구원이 일차적이고, 종교 혹은 교회는 이차적이다. 종교 혹은 교회의 언어는 인류가 일찍이 듣지 못한 구원과 해방을 말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구원을 실현하는 장소는 세상과 인류 역사이다. 그곳에서 구원이 실현되고, 그곳에서 구원이 거절당하는 불행이 일어난다.
인류 역사가 출현하면서부터 출산, 양육, 병 고침, 불쌍히 여김, 사랑 등은 있었다. 이런 현상들을 외면하고 구원을 말할 수는 없다. 그 사실을 ‘세상 밖에 구원 없다’는 격언이 잘 표현한다.
창조된 세상 안에서 인류 역사는 전개된다. 세상은 하느님이 사람들을 매개로 하여 구원 행위를 하시는 무대이다. 종교사들은 전체 역사의 단편들이다. 종교들은 인간이 역사 안에 주어진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분명하게 깨닫는 장소들이다. 각 종교는 그것이 발생한 문화권이 제공한 언어 전통을 지녔다.
(* 사막에서는 생명이 살아남기 위해 현세적이며 배타적인 언어가 구원으로 보였다. 이스라엘에게는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김’이라는 계시 언어가 발생하였다. 제국과 봉건사회에서는 신분 위주의 계급의식과 상위자에 대한 하위자의 순종으로 채색된 언어가 발생하였다. ‘승리하고, 다스리고 명령하는’ 구원의 언어였다.)
인류 역사의 한가운데에 종교들이 나타났다. 종교들은 하느님이 이 세상 안에 이루시는 구원을 해석하고 언어화하여, 역사의 현장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체험하게 한다. 종교들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구원과 인류 역사를 묶어서 구원의 더 깊은 바탕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들이 구원을 종교 혹은 교회와 묶어서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경륜(經綸)을 교리, 전례, 공동체와 동일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이 일방적으로 강조한 것이 구원은 그 종교 혹은 그 교회 안에만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독선적 해석이 그리스도 교회간의 일치 뿐 아니라, 종교간의 일치, 더 나아가서는 인류 전체의 일치를 저해하고 있다. 구원의 역사는 계시의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다. 일반적 구원사가 없으면, 이스라엘과 예수 안에 있었던 계시의 특수사(特殊史)가 없을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은, 그것을 지각한 신앙인들의 의식 안에 있기 전에 역사의 현세적 실재(實在) 안에 이미 있었다. 생명, 사랑, 용서를 위한 사람들의 실천 안에 하느님의 구원은 이미 있었다. 비종교인들과 종교인들의 구원적 행위들 안에 구원은 이미 있었다. 인간을 위해 선을 추구하고 악을 거부하는 구원적 현장에 하느님은 이미 계신다. 하느님의 구원을 사랑의 행위로 실천하는 사람들의 역사적 실천과 더불어 하느님은 세상 안에 살아 계신다. 인간 사회 생활의 무대인 인류 역사는 구원과 불행이 결판나는 장소이다.
하느님과 구원을 위한 그분의 주도권은 인간의 의식 여부와는 별개의 것이다. 또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체험하고 표현하는 것과도 별개의 실재이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언어 및 구원에 대한 우리의 개념들은 변화하는 사회적 · 역사적 맥락에 갇혀 있다. 인간의 언어는 계속 변하는 역사에 묶여 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린 성상(聖像)들이 시대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 한다는 사실이 잘 설명해 준다. (*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에서 예수는 왕이며 목자, 곧 다스리는 자였다. 유럽 중세에서 예수는 심판자이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사랑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처절한 모습의 예수이다. 20세기에는 나자렛에서 노동하는 예수이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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