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와 전승, 우리가 해석해야 할 텍스트
[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4]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라는 인물로 말미암아 발생한 삶의 운동이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성서의 자구(字句)와도, 교의(敎義)적 명제들과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성서와 교의는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체험에 대한 신앙인들의 시대적 증언이며, 인간의 언어이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는 이스라엘과 초기교회가 역사 안에서 체험한 바를 다양한 문학유형(文學類型)으로 표현한 것이다. 역사 안에서 하느님이 하신 일과 그 일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을 문자화하여 정착시킨 것이다. 신앙으로 하는 응답 및 해석도 계시 내용에 속한다.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는 텍스트를 읽고, 그것을 실천하면서 시대적 언어로 전환시키는 삶의 연속이다. 그 안에 성령의 일하심을 보아야 한다. 인간 언어는 초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적 성격을 지녔다.
성서는 객관화된 언어가 담긴 하나의 텍스트이다. 그것을 기록한 사람들의 손아귀를 벗어나서 우리의 자유스런 해석에 맡겨진 텍스트이다.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이 현재 그 텍스트를 매개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행동하게 하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말씀이 강생하여 사람이 되셨다.
성서는 또한 인간의 언어이다. 그 언어는 우리가 출처를 확인할 수 있는 인간 언어 체계 안에 있다. 그 언어의 출처를 확인하는 것이 현대 성서 역사비평학(歷史批評學)이다. 텍스트의 역사적 출처를 고증하여, 그 텍스트가 발생 당시에 지녔던 의미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텍스트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오늘 역사비평적 접근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되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는 말이 있다. 그것을 오늘의 언어로 이해하면, 예수는 방화범이 되기 위해 왔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 두자고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예레 20,9)라는 말씀과 연결하여 해석하면, 예수가 말씀하신 불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성서와 신앙의 전승(傳承)은 신앙인이 해석해야 하는 텍스트이다. 우리가 배워서 익혀야 하는 진리 혹은 교리 내용이 아니다. 성서는 교회 안에 발생하는 모든 신앙언어를 해석하기 위해 최종적 권위를 갖는 경전(經典)이지만, 그것이 기록된 시대와 특정 지역의 역사적 신앙체험을 그 시대 방식으로 증언하는 문서이다. 따라서 성서도 우리가 해석해야 하는 문서다.
신앙전승은 성서가 전하는 신앙체험으로 발생한 각 시대의 증언들이다. 성서나 전승의 문서들 안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음악이라는 진리가 악보라는 죽은 언어 안에 담겨 있고, 그 음악의 연주사(演奏史)라는 연주 행위의 전승이 있듯이, 신앙인의 삶이라는 진리가 성서나 전통의 죽은 문자들 안에 들어 있고, 그것을 산 사람들의 삶의 전승이 있다. 구약성서의 모세 사건이나 신약성서의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사람들에게 삶의 변화를 일으켰다. 따라서 진리는 신앙인의 삶 혹은 실천 안에 있다.
유대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은 진리(眞理) 모습들의 족보(族譜)라고 말할 수 있다. 같은 진리를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구현한 것이다. 같은 진리라는 말은 같은 언어를 반복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신앙언어는 정초(定礎)하는 기원(起源)의 사건과는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지만, 모든 시대를 위해 제공된 지식을 담고 있지 않다. 종교 언어에는 그 시대의 기대, 염원, 이념 등이 들어 있다.
예수 시대 언어의 ‘하늘’은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고 ‘지옥’은 죽은 이들이 가는 곳이다. 유대교 묵시문학의 영향으로 ‘세상 종말’은 어떤 천재지변을 전제하고 있다. “율법에 따르면 피로써 깨끗해지지 않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피 흘리는 일이 없이는 죄를 용서받지 못합니다”(히브 9,22)라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던 유대인들이었다. 그리고 ‘병’은 인간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복음서들은 오늘 우리가 말하는 역사서, 곧 역사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을 알리는 문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은총과 진리”(요한 1,14)를 사람들이 깨닫고, 예수를 따르는 삶을 살아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요한 1,12) 하기 위해 역사의 어느 시점에 기록된 문서들이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실천이다
과거에는 예수에 대한 신약성서 진술들이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현대 역사비평학은 성서 해석에 큰 변화를 주었다. 이 변화와 더불어 발생하는 것이 경직된 보수적(保守的) 성서 해석이다. 성서에 대한 근본주의적 해석은 역사비평적 해석에 대한 반동이다. 그 근본주의적 경직성은 신약성서가 기록될 때에도, 교부(敎父)들의 성서 독서에도 일찍이 없었던 현상이다.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적 접근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시작된 비교적 새로운 연구 방법론이다. 과거 교리서들이 제공한 예수에 대한 표상은 현대 역사비평학이 알려주는 것과 동일하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다. 신앙언어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 김정은이 김정일의 아들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의 부자(父子) 관계를 확인했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했다는 것은 마리아에 대한 산부인과 의무기록지의 진술이 아니고, 하느님은 처녀를 더 좋아한다는 뜻도 아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역사비평적 연구 결과를 그리스도 신앙의 이름으로 배척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외면한다. 과거의 언어에 그냥 머물자는 것이다. 1997년에 로마 교황청이 발간한 <가톨릭교회 교리서>(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도 과거 언어를 반복하는 대표적 교리서이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실천이다. 이 실천은 그리스도 신앙 메시지의 의미를 생성시키고, 그것을 확인하는 장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 상당한 세월이 흐른 다음, 복음서들은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예수의 말씀과 실천은 신앙인들의 실천으로 나타났고 초기 신앙인들이 신약성서를 기록할 때, 예수에 대해 그들 안에 전해진 기억들과 더불어 그들이 신앙인으로서 하던 실천도 함께 기록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실천을 도외시하고, 성서의 이론적 해석에만 머물 수는 없다. 신앙은 실천보다 먼저 있는 이론이 아니다. 신약성서에 역사비평적으로 접근하였을 때, 독자가 만나는 것은 예수로 말미암은 신앙인들의 삶의 변화이다. 따라서 신앙언어는 그것이 실천될 때 바르게 해석되는 것이다. 성서와 실천 사이에는 어떤 순환이 있다. 성서를 이해하면, 실천이 발생하고, 실천을 하는 사람이 성서를 더 올바르게 또한 깊이 있게 이해한다는 뜻이다.
실천이 신앙의 장(場)으로 부각되면서 신앙 이해는 큰 변화를 겪고 있다. 신앙생활은 교리를 배우고, 계명을 지켜서 은총을 얻는 획일적인 것이 아니다. 오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인간 삶의 시대적, 지역적, 개인적 새로운 가능성들의 원동력으로 이해된다. 교부 시대의 신앙 실천, 아시시의 프란시스코 시대의 것, 그리고 아빌라의 데레사의 실천과 샤를 드 푸코의 것이 각각 다르다. 같은 신앙언어가 발생시키는 시대적 실천들이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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