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 부인의 독서와 현미경 관찰

[정양모의 복음과 세상 이야기]

2013-02-18     정양모

태양왕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 온갖 거만을 떨 때 그 주변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을 찾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태양왕의 제수인 오를레앙 공작부인 리슬로트 팔라틴(Liselotte Palatine, 1652~1722)은 지각 있는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 오를레앙 공작부인 리슬로트 팔라틴. Hyacinthe Rigaud 작
리슬로트는 1652년 5월 27일 독일 하이델베르크 영주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생모를 버리고 재혼하는 바람에 리슬로트는 소피아 숙모 댁에서 자랐다. 그는 1671년 19세 때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루이 14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필립과의 정략적 결혼을 받아들였다. 결혼식에 앞서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의식을 치루었다.

아첨꾼들에게 둘러싸여 살던 태양왕은 제수씨가 무척 솔직한 데 감명을 받았다. 또한 제수씨가 사냥과 승마를 즐기는 모습도 신선하게 보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두 가지 사건 때문에 태양왕과 공작부인은 관계가 소원하게 되었다. 1689년, 태양왕은 영토 확장에 혈안이 된 나머지 제수씨 땅은 곧 자기 땅이라는 구실로 사돈인 하이델베르크 영주의 영지(라인란트 팔츠)를 점령했던 것이다.

그리고 삼 년이 지나 1692년에는, 태양왕이 몽테스팡 부인과 야합하여 낳은 사생아 딸과 공작부인의 외아들 필립을 강제로 결혼시켰던 것이다. 1701년 6월 9일 남편인 오를레앙 공작이 뇌일혈로 사망하고, 21년이 지나 1722년 12월 8일 공작부인은 70세를 일기로 종생했다.

공작부인은 시가에서 독일 친정 가족들에게 편지를 써 보내곤 했다. 특히 1689년 태양왕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다음부터 친정 가족들에게, 그 가운데서도 자기를 기른 소피아 숙모께 자주 편지를 썼다. 공작부인이 쓴 편지는 7만 통으로 추산되는데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만도 7천여 통이나 된다. 이 서간집에는 당시의 정치와 사회의 모습, 교회와 신앙의 실상이 생생히 적혀 있다. 공작부인의 사상을 드러내는 두드러진 사례 몇 가지만 서간집에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태양왕이 낭트칙령을 취소한 까닭

프랑스 왕 샤를르 9세의 밀령을 받은 자객들은 1592년 8월 24일 주일 겸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새벽에 파리 시내에 사는 개신교 지도급 인사들을 모조리 살육했다. 피비린내 나는 만행은 삼일 간 계속되었다. 그 여파로 프랑스 여러 지방에서도 개신교도들을 무참히 도륙했다.

파리에서 살해된 개신교도들은 3천여 명, 지방에서 살해된 개신교도들은 3만 명쯤 되리라고 추산한다. 그 결과 가톨릭과 개신교들 사이의 싸움으로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지자, 앙리 4세는 1598년 4~5월 낭트칙령을 선포하여 개신교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겨우 나라의 평온을 되찾았다.

▲ Francois Dubois의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의 대학살.

그런데 태양왕 루이 14세는 1685년 10월 15일자로 낭트칙령을 취소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내세우는 이유가 가관이다. “개신교인들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을 위시해 대부분이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까닭에 낭트칙령 적용은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2천만 프랑스 국민 가운데 1백만이 개신교도였는데 이런 조치를 취했다. 이로써 종교전쟁이 재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이 낭트칙령을 취소하게 된 까닭을 공작부인 팔라틴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늙은 바보년(루이 14세의 계비 Maintenon 부인)과 드 라 셰스(P. de la Chaise : 루이 14세의 고해 신부)가 왕을 설득하여 이르기를, 왕이 개신교도들을 괴롭히고 추방하면 종전에 왕이 몽테스팡 부인과 간통한 죄를 모조리 용서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것이 왕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가련한 왕은 그 말을 굳게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왕은 평생 성경을 한마디도 읽지 않았으니까요. 이렇게 해서 프랑스에서 개신교 박해가 시작 되었습니다."

성당에 가면 절로 잠이 온다

공작부인은 겉으로는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끝까지 개신교도로 머물렀다. 당시 가톨릭 신도들이 성경을 멀리한 것과는 달리 공작부인은 매일 성경을 읽었다. 부인은 정기적으로 가톨릭 미사나 시과경에 참석했지만 신부들이 강론을 시작하거나 수녀들이 시과경 노래를 시작하기만 하면 절로 잠이 스르르 왔다고 한다. 공작부인의 말을 들어보자.

"저는 강론만 들으면 잠이 옵니다. 제게는 강론이 아편 같아요. 언젠가 독감이 들려 사흘 동안 도무지 눈을 붙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당에서 강론을 듣거나 수녀님들의 노래를 듣기만 하면 잠이 온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마차를 타고 수녀원으로 가서 강론을 듣기로 했지요. 수녀들이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잠이 왔습니다. 예식이 거행되는 세 시간 내내 잠을 잤습니다. 예식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까 몸이 아주 가뿐했습니다. 왕 옆에 자리 잡는 것은 큰 광영이지요, 그러나 강론을 들을 때라면 그 자리를 기꺼이 양보하고 싶군요, 왜냐하면 왕은 제가 잠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거든요. 제가 눈을 붙이기만 하면 왕은 팔꿈치로 쳐서 저를 깨운답니다."

가톨릭 신앙 따로 내 신앙 따로

공작부인은 프랑스 가톨릭 성직자들의 가르침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켰다.

"제가 프랑스로 시집왔을 때 수많은 주교들과 대주교들이 저를 찾아와서 저의 가톨릭 신앙을 굳히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톨릭 신앙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들이 가르치는 교리는 일정했지요. 그렇지만 교리를 풀이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야말로 제각각이었어요. 웃음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러니 제가 그전부터 신념을 지니지 않았더라면 저는 어쩔 바를 모르고 방황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저는 ‘내 신앙은 따로 있어’라고 자신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꼭두각시다’라는 제 말에 동의하시니 제 마음이 한결 평안합니다. 하느님을 뵙지 못하면서도 마음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우리를 괴롭히는 이웃도 사랑하라는 계명은 정말 지키기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편이 더 쉬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잘해주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게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승에서 사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잘하고, 나머지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는 게 상책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한 통속이다

공작부인은 가톨릭과 개신교는 근본이 같다고 하면서, 서로를 인정하면 종교분쟁이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시대를 많이 앞서 교회일치에 대한 탁견을 지녔다고 하겠다.

"그리스도인들은 칼을 뽑아 서로 싸우라고 신부들은 충동질하는데 이는 아주 고약한 짓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리스도교 세 종파(가톨릭 · 개신교 · 정교)는 자기네 근본이 같다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교리가 어떻게 서로 다른가를 논하지 말고, 과연 복음에 따라 사는가만 살필 일입니다. 그리고 복음에 역행하는 이들을 거슬러 설교해 마땅합니다. 이러쿵저러쿵 여러 말 할 것 없이 그리스도인들은 교파가 달라도 결혼할 수 있고 각자 자기가 원하는 교파의 교회에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보다 더 일치하는 모습을 띌 것입니다."

공작부인의 독서와 현미경 관찰

공작부인은 3천 권이 넘는 서적을 갖고 있었다니 당시로서는 대단한 장서가였다. 서재에는 리샤르 시몽(Richard Simon 1638~1712) 신부가 쓴 <구약성서 비평사>(1678)도 있었다. 이 책은 역사비평의 효시로서 그 논지를 약술하면 이렇다.

모세오경은 모세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내리쓴 것이 아니라, 여러 서생들이 유구한 구전들을 수집하여 편찬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 학설은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 1844~1918)과 군켈(Hermann Gunkel 1962~1932)에 이르러 비로소 확인되었다. 저 <구약성서 비평사>는 공작부인의 독서 폭과 질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라고 여겨진다.

다른 일화로 공작부인은 현미경 관찰을 즐겼다고 한다. 암스테르담의 반 류벤회크(Van Leeuwenhoek)가 현미경으로 남자의 정충을 관찰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공작부인이 보인 반응은 순진하다 못해 귀엽기까지 하다.

"세상에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습니다. 반 류벤회크는 정확히 관찰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 현미경으로 관찰한 대로 남자들이 사정할 때 정말 버러지를 쏟는다면 우리가 버러지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시대를 수백 년 앞서 산 지각 있는 신앙인, 오를레앙 공작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부지불식간에, 예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하신 말씀을 연상했다.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내가 이스라엘(프랑스 가톨릭!)에서는 어떤 사람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습니다”(마태 8,10 = 루카 7,9). 태양왕 시대에 오를레앙 공작부인만큼 사려 깊은 성직자나 신학자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성직이나 신학이 별 볼일 없다는 또 한 가지 증좌가 아닌가 한다. 

 

 

 

 

정양모 신부/ 193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1960년부터 1970년까지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에서 유학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1970년부터 2002년까지 광주 가톨릭대학교, 서강대학교, 성공회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지냈다. 2005년부터는 다석학회 회장을 맡아 다석사상을 널리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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