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죽음 : 스승님을 떠나보내며

[신학 오디세이아]

2013-01-15     박정은

삶의 길목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 중, 시간이 흘러도 참 존경스럽고, 여전히 그리워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인 것 같다. 나도 내 인생 여정에서 힘을 북돋아 주고, 부축해 주었던 많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고마운 분들이 영원히 우리 곁에 있으리라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지난주에 내가 가슴 깊이 존경하고 따르던 스승이신 수녀님과 이별을 했다.

우선 나처럼 당돌한 영혼에게도 그리고 내 나이에도 모실 스승이 있다니 정말 나는 기가 막히게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다. 그분이 몸담고 있던 곤자가 대학에서 마련한 고별식, 수녀원에서의 장례식, 그리고 무덤에 묻는 예절로 이어지는 행사 속에서, 그분의 삶은 보석처럼 빛나 보였다. 잘 준비된, 그분다운 죽음이었고, 아름다운 죽음이어서 내 마음도 참 기뻤는데, 그래서 흐르는 눈물을 잘 참고 있었는데, 성체를 영하면서 결국 나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부활 신비 속에 계신 수녀님께 결국 남는 후회는 단 하나. 사랑한다고, 또 감사하다고 왜 좀 더 자주 그리고 많이 이야기해드리지 못했나 하는 점이었다. 친절하고 따스한 마음을 담은 작은 카드들을 좀 더 많이 보내드리지 못한 것이 정말 죄송했다.

그 수녀님이 계시던 수녀원에 들어서는데, 모든 사람에게 기꺼이 자기의 시간을 아낌없이 내어주던 수녀님의 웃음 띤 얼굴과 수업을 하고 나서 수녀원에 돌아와서는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를 하던 수녀님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늘 그 수녀님 곁에 가면, 이상한 희망 같은 것이 솟아났었다.

 ⓒ 김용길

바티칸의 미국 수녀회 내사,
수녀들의 분노와 배신감 속에서도 "다시 생각해보자"며 성령님의 음성에 귀기울였던 스승님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년 전, 바티칸은 미국 교회의 수녀회를 내사하기 시작했다. 바티칸이 지정한 사람들이 미국수녀원을 방문해서 보고 들은 바를 보고할뿐더러, 모든 미국 수녀회는 그들의 내부구조, 행정구조, 재정 상태 등 모든 것들을 보고해야 했다. 이에 대해 미국 수녀들은 분개했고, 교회에 관한 배반감을 이야기했다. 21 세기의 종교심판인 거냐는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물론 이 비극적인 사태 이면에는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미국 수녀들의 싸움닭 기질이 가져온 불협화음이 깔려있었다. 특히 미국의 선교 수녀들은 교회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동성애자들이 교회 안에서 자리를 갖도록 소리를 높인다든지, 이민자들의 권익 옹호라든지, 여성의 보호 차원에서 피임을 옹호한다든지, 교회 안에서 여성 사제직을 반대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이유로 교회 당국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지속해 왔다. 더구나 그 한해 뒤, 바티칸은 미국 전체 수도회의 80퍼센트가 소속된 미국 수녀장상 연합회 (NCWR)의 신학을 문제로 삼았는데, 이는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보는 장상연합회 측의 신학과, 성화된 통치조직으로 보는 바티칸 측의 신학이 충돌한 것이다. 솔직히 말해 교회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이런 다른 견해는 마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은 막막함으로 다가왔다.

우리 수녀원도 물론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보고, 어린이와 여성의 권익을 위해 일해 왔고, 당연히 진보적 여성주의 경향을 띤 공동체이다. 교회의 의식 없는 주교님들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며, 사회정의에 대해 무덤덤한 제도 교회에 대해 화를 낸다. 그런데 내가 존경하는 이 수녀님이 교회에 대해, 여성의 지위에 관한 담론에서 화내는 모습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번 고별식에서 그분과 30년을 함께 학교에서 일했던 노(老) 성서학 교수는 “매리 수녀가 페미니스트이기에는 그이는 너무 친절하고 화를 내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교회에 대해 화를 내지 않는 것이 그분의 신앙인 것 같았다. 매번 화가 치미는 상황이 오면, 언제나 수녀님은 “새로운 각도로 생각해 보자”고 이야기했다. 성령께서 이 일을 통해 어떻게 하시는지 같이 보고, 그 방향에서 생각하고 결정하자는 게 그분의 평생 일관된 논지였다. 그런 그분도 최근 교회의 보수화 경향과 바티칸 정신을 따라 걸어 온 수녀회를 불신하는 교회에 대해 배반감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하셨었다.

외국인으로 수녀원에 들어와서 다시 수도생활을 시작할 때, 정말 세밀하게 나를 돌보아 준 것도 이 수녀님이셨다. 결국, 양성과정에서 구조적인 문제를 대면하고 그 어둠을 거두어내었을 때, 그 수녀님은 나를 부르시고, “저기 구름을 봐. 그렇다고 해가 없는 건 아니야. 그냥 신뢰하고 걸어가. 어둠도 신비란다. 그저 신뢰하고 걸어가는 거야” 하시면 내 손을 꼭 잡아 주셨다. 나중에 나의 서원식 날 우연히 찍힌 사진에서 본 수녀님의 얼굴은 진심으로 나를 위해 기뻐하고 계셨다. 나에겐 정말 큰 산과 같은 어른이었고 끝없이 존중해 주는 그분 앞에서 실컷 작아질 수 있어서 참 좋았었다. 나는 결국 그분의 마지막 수련자였고 신학을 하는 동료였다. 그분이 미리 계획하신 장례식에서 나는 그분의 동료를 대표해서 행렬하도록 선별되어 있었다. 따로 나를 위해 바티칸 공의회 책을 남겨주시기를 또한 잊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내가 신학논문을 출판할 때보다 하느님 앞에서 춤을 출 때 더 많이 기뻐하셨다.

암 선고 후, 자신이 사랑했던 바티칸 공의회 문헌 연구에 몰두하셨던 스승님
희망하기 힘든 나에게 마지막 힘을 내어 "그래도 희망하지?"


그분이 암 선고를 받으신 것은 2년 전이다. 죽음을 맞이하면서 그분은 자기에게 남은 모든 에너지를 평생 자신이 사랑하셨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작업에 바쳤다. 우리는 한팀이 되어서 바티칸 공의회 50주년을 맞아 새롭게 공의회 문헌을 연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아픔이나 죽음에 관한 자기연민은 결코 내게 보이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암 투병 중에도 준비위원 모임을 여전히 주도했고 방사선 치료로 힘든 와중에도 바티칸 공의회 이야기만 하면 목소리에 생기가 돋았다. 그것은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삶에 충실하려는 의지 같아서 솔직히 그분이 우러러 보였다.

작년 12월 15일 우리는 모임을 가졌다. 이상하게 그 모임에는 의제가 없었다. 부랴부랴 학기를 마치고 그분이 사시는 워싱턴 주 동쪽 내륙인 스포켄으로 갔다. 조용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모임을 해온 우리들은 모두 이것이 그분을 만나는 마지막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분은 40분의 회의를 위해 7시간을 쉬어야 했다. 늘 그분이 말한 것처럼 ‘최고의 자신 (best self)’ 을 보여주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그분이 거의 예언처럼, 고별사처럼 “교회 안에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셨을 때에는 거의 정신을 잃으신 것 같았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쉬신 후, 우리는 마지막 저녁을 함께했다. 밖에는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우리는 눈물을 감추고 수녀원 방에 마련한 만찬을 즐겼다. 예쁘게 꾸민 식탁에서 그분이 가고 싶어 했던 식당에서 배달해 온 음식을 먹었다. 예수님이 친구들과 나누었던 마지막 우정의 성사가 떠올랐다. 사실 그 상황에서 그 수녀님이 얼마나 음식의 맛을 느끼셨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내게 “너는 수도자들과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셨다. 나는 뜬금없는 그 말이 의문스러웠지만 “네. 그럴게요”하며 웃어드렸다. 그분은 우리가 끝까지 희망하기를 희망하셨다.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상황에서도 수녀님은 한국의 대통령선거를 물어보셨다. 나는 수녀님 말을 흉내 내며 “희망하기를 희망해요”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희망하기가 너무 힘들어요”하자 힘없는 눈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시며, “그래도 희망하지?” 하셨다.

누군가에게 정신적인 힘이 되어준다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다. 살면서 내가 의지할 누군가를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특권인가? 내가 수녀님께 받은 그 지지를 나도 이제 누군가와 나누고 싶단 생각을 한다.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귀찮아하지 않고 성심껏 대해야 한다고 결심도 해본다. 그 수녀님이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지금쯤 천국에서 교황 요한 23세와 샴페인을 듣고 있을 수녀님을 상상했다. 모두가 하느님의 백성임을 천명한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지켜가야 한다는 결심이 새삼 든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며, 우리는 모두 사제요, 예언자요, 왕직에 불림 받았다. 그리고 수녀님의 온화한 투사의 자세를 흉내 내어 본다. 화내면 루저(loser)야. 웃으면서, 어떻게 성령께서 우리나라를 이끄시는지, 교회를 이끄시는지 잘 보면서 움직여가는 거야. 다시 한 번 최선을 다해 희망하는 거야. 그 수녀님의 장례식에는 유독 평신도와 여자들이 많았었다. 그래서 참 아름다왔다.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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