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후보와 거짓 후보
B.C. 150년 경, 로마는 전쟁을 통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인구 450만 명 중에서 노예가 15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할 정도로 전쟁은 수많은 노획물과 전리품을 남겨 주었다. 전쟁을 치루고 돌아온 병사들은 보석을 비롯한 전리품들을 가족들에게 선물로 주었는데, 부인들은 누가 더 크고 좋은 보석을 받았는지 자랑하는 것으로 허영을 채우고 있었다.
어느 날, 그락쿠스 부인의 집에 이웃 여자들이 보석을 비롯한 전리품들을 들고 모였다. 서로 자랑하면서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그락쿠스 부인만 아무 말이 없었다. 가장 용감한 병사의 부인인데 어찌 전리품이 없었겠는가? 여자들이 궁금하여 보여 달라고 재촉하니, 말이 없던 그락쿠스 부인은 집 안으로 들어가 두 아들을 데리고 나왔다. “저에게 가장 큰 보물은 바로 이 아이들이랍니다!” 그락쿠스 부인의 말을 듣고 무색해진 부인들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아마도 마리아가 그랬을 것이다. 어린 예수를 무릎에 앉혀놓고 이렇게 가르쳤을 것이다. 저 가난한 사람들을 눈여겨보아라. 그리고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일은 바로 저 가난한 이들을 위하는 일이란다! 그래서 어린 예수는 지혜롭고 올바른 청년 예수로 성장하였으며 그의 일은 오직 하느님의 뜻을 실현시키는데 집중하였다.
평민을 대변하며 분배 정책에 힘쓴 로마의 그락쿠스 형제
두 아들은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올바르게 잘 자랐다. 그래서 그들은 강대한 권력을 더욱 확대시키고자 골몰하는 귀족들에 맞서 평민의 이익을 쟁취하기 위한 일에 집중하였다. 먼저 형인 티베리우스 그락쿠스가 호민관이 되었다. 귀족들과 평민들의 정책 싸움에서 평민의 대표인 호민관을 맡은 형 그락쿠스는 대토지소유자들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법안을 만들어 통과시켰으나 벌족들은 이를 저지시키기 위해 카피톨 언덕에서 형 그락쿠스를 살해하였다.
그러나 이어서 동생인 가이우스 그락쿠스가 호민관이 되었다. 형의 유지를 이어받아 한층 더 큰 규모의 분배 정책을 만들었지만 그도 원로원의 압력과 방해로 그만 자살하고 말았다. B.C. 133년, 121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100여 년 뒤에 나자렛 사람 예수가 물질의 분배만이 아닌 진정한 나눔과 완전한 평등을 위한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가르쳤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는 반대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분배의 정책을 바로 세우는 작업에서 비록 그락쿠스 형제는 패배하고 말았지만, 자신들의 대표로 그락쿠스 형제를 뽑은 당시의 평민들은 매우 만족했을 것이다. 일종의 경제민주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형제가 대를 이어 목숨까지 희생한 이유는 분배라는 명분과 더불어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표로서의 진실함과 성실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락쿠스 형제가 그러할 수 있었던 덕은 바로 어머니의 교육, 즉 진실하고 성실함이 인간됨의 가장 중요한 덕목임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락쿠스 형제와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락쿠스 형제가 로마 시민들의 이익 외에 노예를 비롯한 다른 민족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는 온 세상의 평화를 위하는 사람이 되기를 선택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역사를 통한 통찰과 겸손한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다른 민족들과의 연대와 나눔을 통해 온 세상 모두의 평화를 꿈꾸고 있다. 자기 국가와 민족의 이익만을 위하지 않고 온 인류가 연대하여 진정한 해방세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해방의 대동 세상!
선거를 앞두고 더 큰 세상, 더 많은 이웃을 생각해야
그러므로 세상의 국가들이 치루고 있는 선거는 자기 나라만의 일이 아니라 세계인 모두의 일이 된다. 특히 이 시대에는 그러할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와 중국의 새 지도자 선출이 다른 나라의 사건에 머물지 않는 이유가 그러하며, 지정학적인 입장에서 우리나라의 미래를 생각하여 강정의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이유가 그러하며, 평화 즉 전쟁 없는 평화를 외치는 이유가 그러하다. 그런 입장에서 올 겨울 우리나라의 대통령 선거는 진실한 후보와 거짓후보를 가려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락쿠스 형제를 뛰어넘는 진실하고 성실한!
중세를 거쳐 근대로 들어서면서 계몽주의자들이 말하기를, 손이 닿지 않는 저 하늘의 우주를 생각하기보다 내가 딛고 있는 이 텃밭의 채소를 생각해야 한다며 교회 권력과 전제군주체제를 비판하였으나, 이제 민주주의를 더 확대 심화시키고 있는 이 시대의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알량한 이익을 안겨주는 자기 텃밭에만 안주하지 말고 더 큰 세상, 더 많은 이웃을 생각하자고!
조욱종 신부 (부산교구 관리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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