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벳 존슨의 “새로운” 마리아

[우리 시대의 신학자]

2012-11-08     조민아

“어머니.”
세상에 이 단어만큼 깊고 뜨겁게 마음을 파고드는 단어가 또 있을까요? 어느 누군들 이 단어에 뭉클한 감정을 품지 않을 이 있겠습니까만, 십년 가까이 외국에 나와 사는 제게는 이 단어가 더더욱 특별합니다. 어머니, 이 단어를 입에 올릴 때마다 떠오르는 그리움과 송구스러운 마음을 차마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몇 년에 한번 씩, 그것도 다만 몇 주 어머니와 함께 지내게 되는 그 시간들이 애틋하기 그지없지요. 참 촌스러운 광경이긴 하지만, 아직도 저와 제 어머니는 공항에서 헤어질 때 서로 먼저 돌아서라 손짓하며 눈이 붓도록 울곤 합니다.

▲ 어머니와 아들, 2007 ⓒ박홍기

가톨릭 전통은 이 “어머니” 라는 단어의 무게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남성으로 대변되는 하느님과 남성의 몸을 입은 그리스도 외에 어떤 피조물에게도 중재자의 위치를 허락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마리아론을 거부한 개신교와는 달리, 가톨릭 신앙은 하느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기억하고 칭송하죠. 아마도 늦깎이 가톨릭 신자가 된 까닭에 더 각별할지 모르지만, 제게는 어머님이라는 존재의 절실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가톨릭 신앙이 참으로 다감하고 인간적으로 느껴집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를 처음으로 바치던 날, “구세주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님, 괴로운 십자가의 길에서 서로 만나시어 사무치는 아픔을 겪으셨으니…” 라는 구절을 듣고는 한동안 멍하게 서 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네요. 아들의 고통보다도 아들의 모욕과 죽음을 그저 지켜봐야 하는 어머니의 고통이 더 아프고 끔찍하게 느껴졌던 까닭이죠. 곰곰 생각해 보면 저는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비로소 예수가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되었다는 육화(肉化)의 신비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 같아요.

교회의 여성상, 어머니 마리아 또는 팜므파탈 이브

하지만, 여성신학자들에게 어머니 마리아는 뜨거운 감자와 같은 존재입니다. 교회가 만들어온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에는 사실 여성들보다도 남성들의 욕망이 더 적극적으로 투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부장적 교회의 여성에 대한 왜곡된 요구와 편견은 마리아를 여성의 모델로 삼으면서 극대화합니다. 지극한 순종과 겸손과 자기희생의 미덕을 갖춘 순결한 여인 마리아는 종종 인류최초의 여성 이브와 비교되며 여성에 대한 이분법적 의식을 낳는데 적극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죠. 즉, 당돌하게도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남편을 죄의 길로 이끈 팜므파탈 이브와 달리, 처녀가 아이를 낳으리라는 황당무계한 말씀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네, 따르겠습니다” 라고 고백한 착한 여자 마리아가 바로 여성이 쫓아야 할 모범으로 자리 잡게 된 겁니다.

▲ 엘리사베스 존슨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이렇듯 여성에 대한 억압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마리아론에 대해 여성신학자들은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꼈습니다. 메리 데일리(Mary Daly)를 선두로, 마리아론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고 성차별적인 요소를 벗겨 내어 여성의 목소리를 진정하게 대변할 수 있는 모델로 재창조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게 되었죠. 꽤 많은 가톨릭 여성신학자들이 마리아론에 대한 참신한 재해석을 내어 놓았지만, 그 중에서도 저는 미국의 여성신학자 엘리사벳 A. 존슨(Elizabeth A. Johnson)의 마리아론을 소개하려합니다. 존슨은 <하느님의 백한 번째 이름> (She Who Is: The Mystery of God in Feminist Theological Discourse)이라는 저서로 널리 알려진 성 요셉 수녀회 소속의 가톨릭 수도자이자 신학자입니다. 가부장적인 교회 내에 여성이미지와 여성언어의 개발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성서전승 속에 등장하는 지혜의 영인 ‘소피아’의 존재를 부각시켜 하느님의 여성성을 설득력 있게 묘사한 북미 여성신학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사람이죠.

2003년에 출판된 <진정한 우리들의 누이: 성인들의 통공 안에서의 마리아신학>(Truly Our Sisters: A Theology of Mary in the Communion of Saints)에서 존슨은 그녀의 주요 관심사인 하느님의 여성성을 더욱 정교한 신학적 관점으로 발전시키는 한편, 마리아라는 인간 여성의 경험을 축으로 어떻게 인간이 하느님의 영과 만나고 함께 역사를 바꾸어 나가는지 보여줍니다. 남성들에 의해 주도된 전통적인 마리아론은 마리아가 갖고 있는 인간의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제거하고, 아예 일찍 부터 하느님의 영광을 잉태할 동정의 성녀, 천상의 어머니가 되도록 예정된 존재로 각색했습니다. 4세기 이후 퍼지게 된 ‘평생동정’ 교리, 근대 이후 선포된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원죄가 없으신 그리스도를 잉태하기 위해 그 어머니 마리아 또한 원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 또 비교적 최근에 선포된 ‘성모 승천’ 교리(마리아가 지상생활을 마친 후 그 영혼과 육신을 지닌 채 하늘의 영광으로 들어갔다는 것) 등을 통해 교회는 마리아에게 평범한 인간들이 꿈 꿀 수 없는 어마어마한 특권을 부여합니다.

 
이 대단한 특권은 가난한 시골뜨기 유대인 여성 마리아를 삶의 역경과 씨름할 필요도 없고, 먹고 사는데 필연적인 모든 유혹, 그중에서도 특히 성적인 욕구로부터도 자유롭고, 자잘한 일상의 일들에 신경 쓸 이유도 없는, 백옥 같은 피부와 눈부신 미모를 가진 그야말로 천상의 여왕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녀가 세상에 온 이유는 오직 하나, 하느님을 잉태하기 위한 것이므로, 대천사 성가브리엘에 나타났을 때 그녀는 망설임 없이, 순진무구하게 “네!” 하고 대답할 수 있었죠. 그녀의 삶에 던져진 유일한 위기는 아들인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였습니다. 그러나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조차 마리아는 아들에게 놓인 잔혹한 운명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교회전통이 빚어 온 마리아의 이미지는 그녀를 초월적 인간으로 묘사하거나 인류가 우러러 마지않는 인간의 모범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언뜻 보기에 여성에게 커다란 지위를 허락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마리아를 이렇듯 신성한 존재로 묘사하는 대신, 영원히 남성을 보조하는 존재, 남성인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영광을 입을 수 있는 존재, 명령에 순종해야만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남성 하느님께 종속시켜 버렸습니다.

존슨이 주목한 여성이자 한 인간으로서의 마리아

엘리사벳 존슨이 제시하는 마리아의 이미지는 사뭇 다릅니다. 존슨은 신약성서에 마리아가 등장하는 13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마리아에게 인간의 모습을 되 찾아줍니다. 이들 에피소드는 뜻밖의 신앙적 도전을 받고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젊은 여성으로서의 마리아 (루가복음 1:26-38), 해산의 고통을 통해 아이를 낳는 세상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 (루가복음 2:1-20), 학살을 피해 이집트로 도망가야 했던 망명자로서의 마리아 (마태오복음 2:13-23), 평범하지 않은 아이를 길러야 하는 부모로서의 마리아 (루가복음 2:41-52), 결혼잔치의 주인인 새신랑의 시름을 덜어주기 위해 아들과 고민하는 맘 좋은 이웃 아주머니 마리아 (요한복음 2:1-11), 그리고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어가는 아들을 지켜봐야 했던 힘없는 민중의 어머니 마리아 (요한복음 19:25-27)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마리아에게 평범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상식과 관습의 틀을 벗어나 하느님의 뜻을 온몸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는 것, 마음에 확실한 뜻이 섰을 때 아버지와, 남편과, 제사장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용기 있게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는 것뿐이죠.

존슨의 마리아론이 다른 여성신학자들의 견해와 구별되는 부분은, 메리 데일리를 비롯한 많은 여성신학자들이 마리아를 하느님으로부터 독립한 자율적인 여신으로 묘사한 것과는 달리, 오히려 마리아를 비 신화화(非神化化)하여 우리네 삶에서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다정하고 씩씩한 아낙으로 묘사했다는 점입니다. 존슨의 책을 통해 만나는 마리아는 참으로 친근합니다. 아무럴 것 없어서 더 위대하고, 평범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더 놀라운 내 어머니, 우리 모두의 어머니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반드시 한 아이의 어머니가 아닐지라도, 당차게 세상의 편견과 싸워 나가는 세상의 모든 여성들, 예쁠 것도 특별할 것도 없지만 꿋꿋하고 기운찬 들풀과 같은 세상의 모든 여성들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그렇게 의연하고, 그렇게 믿음직스럽고, 그렇게 자랑스러운 우리의 누이입니다.

우리는 자주 십자가의 길을 바치며, 버릇처럼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를 되뇔 것입니다. 그때 덧붙여 이렇게 기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땅의 어머니들, 이 땅의 여성들께 청하오니, 당신들이 세상에서 받은 상처 또한 제 맘속에 깊이 새겨주소서.

엘리사벳 A. 존슨의 책:
<하느님의 백한 번 째 이름> (함세웅 번역, 성바오로 딸 수도회, 2001)

 
 
조민아 교수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구성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셀 드 세르토의 시각을 확대 해석해 중세 여성 신비가 헤데비치(Hadewijch)와 재미 예술가 차학경의 글을 분석한 연구로 논문상(John Fenton Prize)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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