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스킬레벡스,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우리의 '몸'으로

[우리 시대의 신학자]

2012-10-12     조민아

3년 전, 논문 자료조사 지원금을 받아 벨기에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던 여행이었어요. 누군가 벨기에를 “충돌하며 소통을 꿈꾸는 나라”라고 이름 지었더군요.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했습니다. 중세후기와 근대초기 유럽 국가들 중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와 함께 “Low Countries(북해연안의 저지대 국가)” 라고 불렸던 벨기에는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의 패권다툼에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던 작은 나라입니다.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에는 종교적 열정도 넘쳐나게 마련이죠. 더군다나, 벨기에의 불안정한 정치적 환경은 평신도 중심 영성운동 형성의 다양한 조건을 제공하게 됩니다. 이곳을 근거지로 발생한 여러 평신도 영성운동들과 신앙단체들은 중세교회에 큰 도전과 자극을 주었는데요, 그 중에서도 베긴회 (Beguine)라 불리는 여성 평신도 수도회의 활동과 업적은 당시의 시대적인 정황으로 볼 때 참으로 혁신적인 운동이었습니다. 교회의 지원과 인가를 받아 형성된 여타의 수도회들과는 달리, 평신도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살다가 결국 조직적인 공동체를 이루게 된 베긴회는 제도교회 신학들을 평신도들의 삶에 천착된 언어로 재해석하고 재창조했습니다.

베긴회 영성의 중심에는 대부분 성체성사가 있었습니다. 세례교인이라면 누구나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성체성사는 중세교회의 억압적 구조 아래 살고 있었던 이들 평신도 여성들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큰 의미이자, 경험이자, 사건이었습니다. 성체 성혈축일을 제정하는데 큰 공헌을 했던 성녀 율리아나(Juliana of Liège, 1192-1258)가 벨기에 출신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오늘 소개할 신학자, 에드워드 스킬레벡스(Edward Schillebeeckx, 1994-2009)도 바로 벨기에에서 태어나, 벨기에의 정치·종교적 환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신학 작업을 했던 분입니다. 스킬레벡스 신학의 중심에도 성체성사가 있었지요. 도미니코 수도회 사제였던 스킬레벡스는 복음과 전통을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에 담아 표현하는 신학저술들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중에서도 성사론(聖事論), 특히 성체성사 신학으로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오늘은 스킬레벡스의 신학을 통해 우리의 삶, 또 해방을 향한 몸짓들을 어떻게 성체성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에드워드 스킬레벡스(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스킬레벡스는 1914년 벨기에의 안트베르펜(Antwerpen)에서 태어났습니다. 1934년 20세에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해 27세 때 사제 서품을 받았고, 1983년 69세로 은퇴하기 까지 네덜란드의 니즈메겐 가톨릭 대학교 (Catholic University in Nijmegen)에서 가르쳤습니다. 교회와 세계가 관계 맺는 방식에 늘 관심이 있었던 스킬레벡스는 일찍부터 네덜란드 주교들의 고문으로 활약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계기로 시작된 개혁운동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정작 교황청과는 평생 썩 편안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스킬레벡스 신학의 핵심이 되는 세 단어는 성체성사, 경험, 고통입니다. 우선, 1957년 출판된 <그리스도, 하느님 만남의 성사>(Christ the Sacrament of the Encounter with God)는 초기저작이지만 스킬레벡스의 성사론, 특히 성체성사에 관한 이해가 집약적으로 잘 표현된 책입니다. 이 책에서 스킬레벡스는 성체성사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personal encounter)으로 설명합니다. 성사는 본래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하느님의 신성을 우리의 몸과 물질을 통해 보고 만질 수 있도록 초대하는 매개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본질적 성사죠.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 된다는 것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하느님을 우리의 삶으로 경험하는 것, 즉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스킬레벡스의 제안은 가톨릭 주류 신학을 지배하고 있던 기계론적이고 기능론적인 성사론에서 벗어나 인격적이고 실존주의적 접근으로 성사를 이해한 파격적인 제안으로 평가됩니다. 즉, 이전의 교부신학이 하느님의 신비를 매개하는 성사의 기능적인 측면을 강조했다면, 스킬레벡스는 그리스도를 모든 성사의 근본이 되는 원초적 성사로 제시함으로써, 성사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만남의 장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스킬레벡스의 성체성사에 대한 이해는 또한 ‘경험’에 관한 그의 신학적 입장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습니다. 1974년에 출판된 스킬레벡스의 3부작, <예수>(Jesus), <그리스도>(Christ), 그리고 <교회: 인간의 얼굴을 한 하느님>(Church: The Human Face of God)은 예수와 초대그리스도교 운동에 관한 치밀하고도 방대한 연구서인데, 그 중에서도 초대 공동체의 ‘경험’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스킬레벡스가 예수와 초대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 단초는 ‘경험’입니다. 예수라는 인물이 삶을 통해 보여준 아빠(abba,‘아버지’라는 뜻의 아람어, 대표적으로 마르코 복음 14장 36절에서 사용되었다-편집자 주) 하느님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 그리고 그 예수와 동고동락한 사도들의 개인적, 공동체적 ‘경험’을 설명하고, 그 경험을 통해 예수와 사도들의 관계, 나아가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스킬레벡스에게 ‘경험’이란 무엇일까요? 스킬레벡스는 ‘경험’을 하느님의 계시가 전달되는 수단이라 주장합니다. 이 말은, 계시는 말이나 명제나 개념으로 그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속에서 체현되어야 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예수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며 계시이지만, 그 계시가 드러난 지점은 예수라는 한 인간의 삶과 경험입니다. 따라서 삶을 통한 경험이 없이 우리는 계시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예수가 누구이며 그가 선포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 우리는 예수의 행함을 쫓아야하며, 예수의 삶을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이 예수와 개인적으로 만나는 장, 인간이 된 그의 몸과 또 다른 인간인 나의 몸이 만나는, 그의 살과 나의 살, 그의 피와 나의 피, 따라서 그의 경험과 나의 경험이 하나 되는 그 장이 바로 성체성사죠.

▲ 에드워드 스킬레벡스의 책 <그리스도, 하느님 만남의 성사>
성체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 된다는 의미는 단지 개인적인 혹은 영적인 의미만을 내포하지 않습니다. 바로 스킬레벡스의 신학에서 고통이 중요한 신학적 단서로 제시되는 지점입니다. 스킬레벡스에게 있어 성체성사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일치란, 그리스도가 그랬듯이 세상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시가 그리스도라는 구체적인 인간으로 육화하였듯이, 경험이란 항상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은 구체적인 인간의 고난과 고통의 문제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하죠.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은 고통과 함께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통에 항상 하느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례를 통해 소진될 수 없듯, 하느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시지만 우리가 다다를 수 없는 신비 가운데 거하시며 약속으로서 우리보다 앞서 가십니다. 그 하느님은 당신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가 무너질 때까지 지켜보는 그런 잔혹한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를 살피시고 생각하시며 다만 한 발짝 앞서나가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스킬레벡스는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는 세계와 병립(alongside)하지 않습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고 세상을 통해서(in and through) 드러나고 움직이죠.

짐작하셨겠지만, 스킬레벡스의 신학에서 성체성사, 경험, 고통 이 세 가지는 상호 의존적입니다. 우선, 성체성사는 하느님 현존의 실재(the reality of God’s presence) 가 우리를 부르시는 장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경험함으로써 하느님과 만나고 소통하죠. 성체성사에서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은 즉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신, 동참하고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하느님이 인간의 고통에 얼마나 밀착해 계신지를 보여주는 증거죠. 이렇게 그리스도와 일치된 이상,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쫓아 세상의 고통에 동참해야 합니다. 결국 고통을 통해 우리는 다시 성찬례로, 하느님께 더 가까이 불려들여집니다. 우리와 한 몸이 되어 고통에 동참하시지만 항상 희망을 불어 넣어 주시는 하느님께 의지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스킬레벡스가 말하는 성찬례란 일차적으로는 영성체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일상적, 실존적 만남을 뜻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실존적 만남을 통해 진정한 인간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인간됨이란,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성사이듯,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성사가 되는 것이죠. 자발적 참여를 통한 고통의 경험을 매개로 우리는 성사의 궁극적 의미, 진정한 인간됨으로 나아가 결국 하느님의 성사가 될 수 있습니다.

스킬레벡스의 삶은 그의 신학이 단지 말뿐이 아니었음을 입증합니다. 그는 스스로 하느님의 성사로 살기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던 신학자였습니다. 고통을 창출하는 다양한 억압기제를 분석하고 자신의 학문에 적용하는 능동적인 신학자였고, 분석 끝에 도출된 이론을 실제 실천에 적용하는 행동하는 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후기에 와서는 전쟁과 폭력, 경제적 억압과 사회적 압제에 더욱 더 거침없이 비판의 소리를 높였죠. 가톨릭교회의 경계를 넘어 교회 일치를 위한 활동에도 적극적이었고,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비신자들에게도 아낌없는 지지를 보냈습니다. 억압에 저항하고 해방을 앞당기는 일은 스킬레벡스에게 있어 신학의 부업이 아니라 본업이었습니다. 그에게 신학자의 역할이란, 어디서 이 억압이 재생산되고 있으며 어디서 해방의 기운이 솟아나고 있는지 알려주고 선전하며,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이들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숱한 비판과 논쟁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이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참고서적
<교회 직무론(교역론-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와 그 지도자들)>, 분도출판사, 1985년

 
 
조민아 교수
미국 에모리대학에서 구성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셀 드 세르토의 시각을 확대 해석해 중세 여성 신비가 헤데비치(Hadewijch)와 재미 예술가 차학경의 글을 분석한 연구로 논문상(John Fenton Prize)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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