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 푸이란, 아시아와 북아메리카를 잇는 여성신학
[우리 시대의 신학자]
미국이라는 이 거대한 사회를 병들게 하는 많은 문제들 중에서도, 가장 깊숙하게 곪아 있는 문제는 아마도 인종차별일 것입니다. 남부에서 나고 자란 백인 아주머니와 한집에 오래 살다 보니, 알게 모르게 이들의 생활 면면히 배어 있는 인종적 편견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공립학교 교사인 덕에 인종차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고, 본인이 인종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이 아주머니조차도 매일 아침 식사를 하는 식당은 백인들이 대부분인 소위 “백인식당”입니다.
가끔 아주머니와 함께 이 식당에서 아침을 먹다 보면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곤 합니다. 가관이 아니죠. 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경제위기로 말미암은 제반 사회적 불평불만들을 이들은 겁도 없이 “흑인이 대통령이 된 탓”으로 돌립니다. 말하자면 “흑인이 대통령이 된 까닭에 쓸데없는 문제들에 신경을 쓰고 세금을 퍼붓느라 ‘나라의 중추’인 우리들 ‘중산층’을 돌아보지 못한다.” 라는 식이죠.
미국의 아시아인, 흑백 양쪽 어느 곳에도 편입하지 못한 "틈새의 존재"
주류 미국인들의 시각에서 봤을 때 낯설기만 하고 생긴 것 마저 희한한 아시안들은 이들 미국인들이 만들어낸 신화에 따라 제멋대로 표상되고 기호화하기 일쑤입니다. 이 표상과 기호들도 나름 “진화”를 거쳐 왔죠. 1960년대 이전 까지만 해도 더럽고 엽기적이고 신뢰할 수 없고 치사한 잉여인간들 (이 반대편에는 어여쁘고 신기하고 관능적인 중국인형 혹은 게이샤도 있습니다)로 존재하다가, 1970-80년대 아시아지역이 세계 자본주의의 무시할 수 없는 주체로 떠오름과 동시에 “피도 눈물도 없는 경제동물”로 일종의 “신분상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1990년 대 이후, 바야흐로 미국의 주류로 편입을 시도하는 아시안 아메리칸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자, 이제는 “역경을 헤치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성공의 본보기”가 되어 심지어 존경과 시기까지 받게 되었죠.
극단적 부정론에서 과도한 긍정론으로 아시아인들을 보는 시각이 바뀜에 따라, 아시안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인종차별의 현실을 부정하는 보수적 정치인들에게 사랑 받는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아시안들을 모범 소수 민족으로 부각시키면 미국이 아직도 이민자들의 꿈을 실현시켜주고, 누구에게나 성공의 기회를 제공하는 지상 천국임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로써 흑인들과 라틴 아메리칸 이민자들의 인종차별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제 3자인 아시안 아메리칸의 현실
이들에게 교회와 신학은 어떤 의미인가?
현실은 어떨까요? 전체 미국 인구수의 4.8% 혹은 5.6%에 달하는 아시안 아메리칸들에게 이 극소수의 성공담은 그야말로 신화처럼 존재할 뿐입니다. 대부분의 아시안 아메리칸들은 이 미국 땅에서 영원한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그야말로 “틈새”에 붙어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흑백 양쪽 모두와 영역 다툼, 생존권 다툼을 벌여야 하고, 라틴아메리칸 이민자들과도 쉽게 갈등을 겪곤 하죠. 성공신화는 때로 아시안 아메리칸 내부의 경쟁을 촉발시켜 서로 반목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기호와 표상으로만 존재하는 영원한 제 3자들로서의 삶이 아시안 아메리칸들의 현실입니다.
곽 푸이란은 홍콩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으로 유학, 박사학위를 마친 후 미국에 남아 아시안 아메리칸 신학자로 활동하고 있죠. 저는 사실 이 분을 뵐 기회가 종종 있습니다.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7년 전 팬어텀(PANAAWTM)연례모임에서였습니다. 팬어텀은 “아시아 태평양/북미 아시안 여성신학자들과 목회자들 모임 (Pacific Asian North Asian American Women in Theology and Ministry)”의 줄임 말입니다. 1984년 소그룹 형태로 출발한 이 모임은 현재 북미의 아시안/아시안 아메리칸 여성 목회자와 신학자들을 가장 든든하게 지지하는 네트워크으로 성장했죠. 종단과 교단을 초월하는 그리스도교 여성들이 해마다 한 번씩 모여 신학과 삶을 나누는 귀중한 모임입니다. 아마도 아시안/아시안 아메리칸으로서 북미에서 여성신학을 하고자 한다면, 이 팬어텀 네트워크과 언제든 자연스럽게 연결이 될 겁니다.
곽 푸이란은 창설 때부터 팬어텀을 지탱하고 움직여 온 핵심회원 중 한 사람이죠. 선생님은 화려한 경력과 명쾌한 글, 왕성한 활동은 물론이거니와 인간적으로도 참 매력이 있는 분입니다. 검박한 외양과 겉치레 없는 태도 덕분에, 초면에는 무뚝뚝하고 딱딱한 분이라고 오해를 사기 십상이지만 꾸준히 만남을 이어가다 보면 참으로 섬세하고 속정 깊고 담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죠.
<탈 식민주의적 상상력과 여성신학(Postcolonial Imagination and Feminist Theology)>이라는 책은 곽 푸이란이 2005년에 펴낸 책입니다. 이 책은 반드시 “아시안 아메리칸” 신학의 구상을 위해 쓰인 책만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가 아시아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교인과 북미와 유럽에 살고 있는 아시아 이민자들 양쪽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진단하고, 이 양쪽의 문제가 어떻게 분리될 수 없는지,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책이죠.
유럽의 식민주의는 지난 역사 속에서 유럽인들과 유럽문화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다르다”기 보다 “틀린 것”으로, “이상한 것”으로, “배척해야 할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식민주의와 동고동락을 해왔던 그리스도교는 그런 유럽인들의 식민적 담론에 “하느님의 이름”을 부여했죠. “하느님의 이름”으로 유럽의 그리스도교는 진리와 규범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식민주의적 그리스도교는 유럽인들 뿐 아니라 피 식민지인들의 의식에까지 깊숙하게 잠식해 있습니다. 저항과 연대를 가로 막는 결정적인 장애물이죠. 곽 푸이란은 이런 식민주의의 잘못된 표상과 기호들을 비판하고 도전하는 것이 아시안/아시안 아메리칸 신학의 첫 번째 과제라고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 고민의 과제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본질에 대한 성찰입니다. 식민의 역사는 마치 그리스도교가 그 태생에서부터 단일하고 일관된 전승을 갖고 있는 것처럼 왜곡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그 자체가 다차원적이고 복합적인 전승과 이야기들의 집합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조차도 인간과 신의, 삼위이자 일체의, 개별 역사와 보편역사 등 다차원 적인 개념을 수용하지 않는 한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교 자체가 “탈 역사적인, 보편적인, 일관된, 일치된” 진리라는 잘못된 인식이 사라진다면, 이질적이고 다양한 이른 바 “잡종”들의 떠도는 삶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하게 털어 놓을 공간이 생겨날 것입니다.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잇는 곽 푸이란의 신학
식민주의를 넘어 계급, 인종, 자본주의, 가부장제, 공동체 내의 문제점까지 총체적으로 고민
아시안 공동체들이 갖고 있는 “문화”는 이러한 탈 식민주의적 읽기를 가능케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많은 아시안/아시안 아메리칸 신학자들이 아시아의 지혜전승들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재해석하는 비교/교차 연구를 시도해왔죠. 그러나 곽 푸이란은 이러한 이전의 아시안/아메리칸 신학 방법론 또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아시아의 지혜전승에 전래되는 계급주의와 가부장제도가 탈 역사적으로 수용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죠. 그리스도교가 역사적 맥락을 초월한 진리로 수용될 수 없듯, 아시아의 지혜 전승 또한 역사적 맥락 없이 진리로 수용될 수 없습니다. 때로 그 지혜 전승조차 식민주의의 담론으로 역이용되는 예를 우리는 종종 발견하게 되죠. 식민과 피식민의 문제는 두부 썰 듯 나뉘어 질 수 없는 복잡한 이해관계를 동반하기 마련입니다.
곽 푸이란이 제시하는 탈 식민주의적 그리스도교 읽기는 계급과, 인종과, 자본주의적 현실과, 가부장제와, 식민주의적 담론과, 아시안 공동체 내의 문제점까지 총체적으로 고민하는 다 차원적 접근 방법입니다. 이 접근 방법을 위해 곽 푸이란이 택하는 “새로운 전승”들은 아시안 공동체들의 고대 전승들이 아니라, 바로 이 전승들의 영향과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동시에 받고 자라나 현실을 살아가고 현실의 문제들과 투쟁하는 기층 민중들, 그 중에서도 여성들입니다. 바로 이들을 통해 새로운 담론의 공간을 만드는 것, 이들의 삶을 보이고 읽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시급하다고 합니다. 곽 푸이란은 이들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신학자들의 역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이들이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도록,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고 자신의 삶과 생명을 돌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 아시안 아메리칸 여성신학의 목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담론의 공간을 위해 아시안/아시안 아메리칸 신학은 “탈 식민주의적 상상력”을 갖춰야 합니다. 보이는 것 이면을 볼 수 있는 시각, 신화와 표상과 기호로 포장된 삶 이면의 현실을 볼 수 있는 시각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이 탈 식민주의적 상상력이죠. 이 상상력이 아시안 아메리칸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에서 피어날 때, 그들의 경험과 만나 새로운 표상들과 기호들을 만들어 낼 때, 그리하여 흩어져 있는 희미한 틈새의 삶들을 하나 둘 드러날 때, 또 그 드러난 서로의 모습들을 마주 볼 때—마침내 그 틈새들은 가시적인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시안 아메리칸 여성신학은 바로 그 공간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바로 제가 해마다 반갑게 만나는 팬어텀 네트워크의 여성들이 하고 있는 일이지요. 그리고 물론 이 공간은 한국에 살고 있고, 한국에서 신학을 하고자 하는 여성들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 곽 푸이란의 책들 (아직 한국에 번역된 책이 없습니다.)
<Postcolonial Imagination and Feminist Theology, Westminster/John Knox Press, 2005>, <Introducing Asian Feminist Theology.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2000>, <Discovering the Bible in the Non-Biblical World. Maryknoll, N.Y.: Orbis Books, 1995>, <Chinese Women and Christianity: 1860-1927. Atlanta: Scholars Press, 1992>
* 팬어텀의 웹사이트 주소
http://www.panaawt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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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에모리대학에서 구성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셀 드 세르토의 시각을 확대 해석해 중세 여성 신비가 헤데비치(Hadewijch)와 재미 예술가 차학경의 글을 분석한 연구로 논문상(John Fenton Prize)을 수상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