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와 은총의 시인 구상 선생 (2)

[정양모 신부의 복음과 세상 이야기]

2012-08-08     정양모

셋째 마당 ‘속되고 성스러운 교회’

구상 선생은 우리 교회 안에서 안주하기보다는 교회 현실에 고뇌하면서, 때로는 노여워하면서 살아오신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교회 간의 엄청난 괴리 현상, 질적으로 세속과 다른 대안사회 · 대조사회 · 대척사회가 되기는커녕 자꾸만 세속을 닮아가는 교회, 마태오의 표현 따라 ‘땅의 소금 · 세상의 빛’이 되기는커녕 “회칠한 신의 무덤으로 보이는” 교회(<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시편 65’), 존재의 차원으로 마음을 드높여야 마땅하거늘 소유의 차원에서 놀아나는 교회, 실패와 죽음을 택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생각은 접어두고 어쨌든지 이기려고 전술 · 전략을 짜는 교회 현실을 선생은 안타까워한다.

일찍이 교부들은 교회의 양면성을 가리켜 ‘속되고 성스러운 교회, 탕녀이면서 성녀인 교회’라 하였다. 구상 선생 역시 야누스의 얼굴을 지닌 교회의 모순을 아주 가까이서 체험한 적이 있다. 서울대교구에서 경영하던 <경향신문>을 5·16 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선생이 인수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교회 지도자들의 죄상을 생생하게 목도한 나머지 교회를 등질 생각까지 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고 술회한다. 1947년 공산당에게 납치되어 7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다가 영영 행방불명이 되신 형님 구대준 신부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단다. 그때의 참담한 심경을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어로 형상화하였다.

▲구상 시인
내가 희망치도 않은 이해에 얽혀
교회의 암흑면을 체험하게 된 것은
내 영혼의 치명상이었다.
견월망지(見月忘指)라는 불도문자를
되외우고 되씹고 되새겨도
그 더러운 사제의 손에서
성체의 비의(秘義)를 용납할 수가 없었고
도처에 높이 솟아 있는 교회당들이
회칠한 신의 무덤으로 보여졌다.
내 손으로 그들의 가슴과 등에다
‘주홍글씨’를 써붙이지 않은 것은
북한에서 공산당에게 납치되어 간
가형 신부의 어질고 슬픈 얼굴이
떠오르고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사도의 우두머리 ‘베드로’가
스승 예수를 한낱 계집종 앞에서
배반한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러한 죄인들로 이어 내려온 교회가
붕괴되지 않고 그 신성성을 유지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시편 65’)

그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 장군이 교회 지도자들을 고발, 처치하라고 종용하자, 선생은 마태오 복음 5장 39절을 내세워 그럴 수는 없다고 답변했다. “누가 당신의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그에게 다른쪽 뺨마저 돌려대시오”(마태 5,39)라고 하신 말씀을 정확히 상기하지 못하여, 오른쪽 뺨과 왼쪽 뺨을 뒤바꾸었지만, 그거야 무슨 대수인가. 선생은 박정희 장군과의 독대(獨對)를 이렇게 읊었다.

“그 신문사 일 어떻게 되었어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시 줄을 쓰는 것밖엔 없나 봅니다.”
“보고를 받아 다 알고 있어요. 교회라는 거룩한 탈을 쓰고 그 짓들인데 그 사람들 법(法)으로 혼들을 내 주시죠. 그렇듯 당하고만 가만히 계실 거예요?”
“그럼 어쩝니까? 예수가 왼뺨을 치면 오른쪽 뺨을 내 대라고 가르치셨는 데야!”
“그래서야 어디 세상을 바로잡을 수가 있습니까?”
“그게 바로 천주학의 어려운 점이지요!”
“천주학이라!”
그는 그 말을 되뇌까리면서 더 이상 나를 힐난하려 들지는 않았으나 자못 내가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이때 그는 나를 현실에 이끌어들이려는 생각을 단념했을 것이다.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시편 66’)

예리한 지성과 예민한 감성을 겸비한 노시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몸담고 있으면서 겪는 고통 중의 하나는 겉만 번지르르한 빈말이리라.

시인의 일본 유학시절 회고담을 들어보자.

“불교에도 기독교의 10계명처럼 10악이 있습니다. 그 10악 중 하나가 기어(綺語)올시다. 기어는 실 사(糸)변에 기이할 기(奇)를 쓰는 비단 기(綺)자와 말씀 어(語)를 쓰는데, 이것은 비단같은 말, 즉 꾸며낸 말이라는 뜻입니다. 교묘하게 꾸며서 겉과 속이 다른, 실재가 없는 말로서 이것이 10악 중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우송(友松) 교수는 이 기어의 죄를 누가 가장 잘 범하기 쉬운가 하면 종교인들과 문학가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종교인들과 문학가들은 이런 범하기 쉬운 기어의 죄로 인해 지옥 중에서도 가장 하층인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 요새말로 하면 혀가 만발이나 빠지는 형벌을 받으리라는 우스운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문학을 지망하고 있었고 또 신앙을 지니고 문학을 해보자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아주 전율마저 느꼈던 것입니다.” (<詩와 삶의 노트>, 321-322쪽)

넷째 마당 ‘세상만사 은총인 것을’

이순(耳順)에서부터인가 선생의 시편은 달인의 경지에 이른다. 드디어 시인은 신령한 말씀에 응답하고 신묘한 손길에 이끌리어 덧없는 인생길을 차분히 걸어간다. 영원자에 맞닿아 무상을 수락하고 무한자에 이어져 유한을 포용하니, 달관과 통달, 체념과 체관, 초연과 초탈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참을 깨치기보다 참을 섬기려고 애써온 시인, 진리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기보다 흠숭의 대상으로 받들어온 노시인의 유치찬란한 모습이다. 이제 어줍잖은 풀이는 집어치우고 이승과 저승이 화합하는 시편들을 전재한다.

이렁성 저렁성
내 인생은 저물어 가는데
예전에는 그렇듯 불안하던 죽음도
엄마의 품처럼 아늑하게 여겨진다.
(시화집 <유치찬란>, 삼성출판사, 1989년, 72쪽,
시제 ‘이렁성 저렁성’)

이제 세월처럼 흘러가는
나의 세상 속에서
가쁘던 숨결은 식어가고
뉘우침마저 희미해가는 가슴

나보다도 진해진 그림자를
밟고 서면
꿈결 속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그리 심심해 서 있으면
해어진 호주머니 구멍으로부터
바램과 추억이 새어나가고
꽁초도 사랑도 흘러나가고
무엇도 무엇도 떨어져 버리면

나를 취케할 아편도 술도 없어
홀로 깨어 있노라.
아무렇지도 않노라.
(시집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다면>, 113~114쪽, 시제 ‘은행―우리 부부의 노래’)

이처럼 달관의 경지에 다다른 시인이 타인을 보는 눈은 연민으로 가득 차서 그윽하고 너그럽다. 예수님이 운명하기 전에 바치신 청원기도(루카 23,34)를 본뜬 시제 ‘기도’를 예로 들 수 있다.

저들은 저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눈 먼 싸움에서
우리를 건져 주소서.

두 이레 강아지 눈만큼이라도
보이게 하소서.
(<유치찬란>, 95쪽)

▲ 구상 문학총서 1,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홍성사, 2002.
예언자의 형안으로 오늘날의 비정한 세태를 질타할 때도 시인은 사랑을 잃지 않는다. 핏발서린 독재자도(<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시편’ 56. 59. 60. 66. 74. 77. 87), 우매한 백성도(시선 <드레퓌스의 벤취에서>, 고려원, 1984년, 69~71. 243~250쪽) 결코 저주와 말살의 대상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연민과 순화의 대상인 것이다. 시심의 근본은 사무사(思無邪)라는 공자의 명언을 연상케 된다. 시인이 구약성서를, 구약의 백미 시편조차도 거의 거론하지 않는 사실을 이제 이해할 것만 같다. 구약성서는 너무나도 독선과 배타성이 밴 모진 경전인 까닭이겠다.

이제 연작시 <그리스도 폴의 강>에 들어 있는 ‘시편 10’ 후반부를 옮겨 적는다(<드레퓌스의 벤취에서>, 237~238쪽; <시와 삶의 노트>, 118쪽에 풀이가 있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인생무상과 내세 부활을 이보다 아름답게 묘사한 심상(心像)을 본 적이 없다.

나도 머지 않아 여기를 흘러가며
지금 내 옆에 앉아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이 막내애의
그 아들이나 아니면 그 손주놈의
무심한 눈빛과 마주치겠지?

그리고 어느 날 이 자리에서
또다시 내가 찬미(讚美)만의 모습으로
앉아 있겠지.

달인의 덕목은 무애와 겸손이라 자신의 숨겨진 유한성을 만인 앞에 드러낼 용기가 생기는 것일까. 육정의 사연(<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시편’ 4. 8. 31. 38. 45. 59; <드레퓌스의 벤취에서> 45쪽; <유치찬란> 36쪽), 일제 어용신문 기자 생활(<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시편’ 13), 기이한 가출(<詩와 삶의 노트> 130~131쪽), 박정희 장군과의 친분(<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시편’ 56. 59. 60. 66. 74. 77. 87) 등 실로 남이 알까 두려운 일들을 거침없이 겨레 앞에 고백하고 있으니 이 아니 놀라운가.

부인과 독립운동가들이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박정희 장군에게 억울하게 당해서 한맺힌 이들이 살아서 지켜보고 있는데 저렇듯 솔직히 고백하다니. 북아프리카 태생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이후, 이만큼 자신을 노출시킨 분이 또 있을까. 실로 전율을 자아내는 담대한 고해(告解)다.

다섯째 마당 ‘만남의 비의’

선생은 1961년 봄 동경 서점가에서 <현대 최고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을 사서 밤새워 읽고는 ‘은혜의 책’이라고 이름 지었다. 시인은 일생을 좌우한 그 은혜로운 만남에 너무나 감격해서 다음과 같은 사철인곡(思哲人曲)을 읊었다.

가브리엘 마르셀 선생!

당신은 역사에 대한 거듭된 절망으로
허무의 수렁에 빠져 있는 나에게
삶의 새로운 긍정의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당신은 육신과 분리되어 있는 나의 영혼을
도로 함께 살게 해주셨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인간은 홀로서이지만
또한 더불어서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유한성에 대한 자각이
겸손에 이어져야 함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신비가 공허가 아니고
충만임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한 치를 주려서 사는 것이
한 치를 초월해 사는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신에게서 나는 내세를 오늘부터
살아야함을 배웠습니다.

오오, 만남의 비의(秘義)여!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시편’ 63)

▲ 공초 오상순 시인
그보다 훨씬 앞서 아주 소중한 인연이 있었으니 1947년 2월 중순, 가족은 원산에 남겨둔 채 구사일생 38선을 넘어 서울에 도착해서 공초 오상순(空超 吳相淳, 1894~1963) 도인을 만났던 것이다. 도인은 사변 전엔 주로 명동 무궁원 술집에서, 수복 후엔 명동 청동다방에 진을 치고 줄담배를 피우며 형이상학적인 선문답으로 젊은이들과 대화의 향연을 벌였다고 한다.

해방 후부터 그러기를 무려 18년. 1963년 6월 3일 칠순으로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임종하면서 “자유가 나를 구속했었다”라는 사세구(辭世句)를 남겼다고 한다. 평생 독신·무위에다 무소유·무애행을 체현한 도인의 엄청난 임종게는 마치 자신의 일생을 부정하는 것 같지만, 실은 긍정한 것이라고 구상 시생은 풀이한다. 저 임종게는 일종의 반어법으로서 ‘자유가 나를 속박했었다’라는 말이 아니고 ‘자유가 나를 구원했었다’라는 뜻이라나. 어쨌거나 기독자 초월시인 구상은 그리움 가득한 시어로 불자 초월시인 공초를 되새기고 기리곤 한다(<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시편’ 20. 21. 40. 64; <유치찬란> 42. 44쪽).

대구 피난살이 중에는 야인 김익진(也人 金益鎭, 1906~1970) 도인과 인연을 맺는다. 이분은 중국 석학 오경웅이 쓴 <동서의 피안>과 <내심낙원>을 우리말로 옮긴 분이다. ‘사의 찬미’를 부른 가수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진 김우진의 아우 되는 분이기도 하다. 야인은 구상을 만나자 곧 의기투합해서 프랜시스 톰슨의 ‘하늘의 사냥개’ 영어 원문을 건네주고, 함께 프란치스코 제4회를 창립하였다고 한다. 야인은 그 회 원장에, 구상은 수련장에 취임하고, 영혼의 문둥이들에게만 입회 자격을 주었다나. 만나면 영혼의 놀이터라는 술자리를 벌이고 거나하게 취해서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노래’를 번안하여 하느님을 찬미 찬송했다니 가히 가톨릭적 낭만의 극치라 하겠다.

내 주여! 당신은 우리의 형제
해님에게 찬미를 받으소서.
내 주여! 당신은 우리의 자매
달이며 별들에게 찬미 받으소서.
내 주여! 당신은 우리의 모친인 땅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내 주여! 당신은 우리의 형제인 술에게서,
이 막걸리에게서 찬미를 받으소서.
내 주여! 당신은 우리의 자매 이 놋그릇
잔에서 찬미를 받으소서.
내 주 천주여! 당신은 특별히 우리의 모주꾼
형제에게서 가장 큰 찬미를 받으소서.

그런가 하면 큰데레사 성녀의 말씀을 빌어서 천주님을 원망한 놀이 역시 그 얼마나 흥겨운가.

"천주님, 당신의 친구 대접이 겨우 이 꼬라지란 말입니까? 그래서 당신에겐 그렇듯 친구가 적단 말이에요."
(<詩와 삶의 노트>, 134~136쪽)

공초와 야인이 ‘찬미의 모습’이 된지 오래인 이즈음에는 ‘걸레 스님’ 중광과 곧잘 노닌다. 영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라고들 하지만 중광은 구상을 생불로 받들고, 구상은 중광을 두고 “내 삶의 허덕허덕 마루턱에서 느닷없이 만난 은총의 소나기”라고 치켜세운다(<유치찬란> 128쪽).

최근의 일화 한 토막. 하루 종일 비가 부슬부슬 내린 1990년 6월 8일, 중광이 몸에는 누더기, 발에는 슬리퍼, 손에는 먹거리 비닐봉지, 물에 빠진 생쥐꼴로 동숭동 대학로를 거닐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구상 선생이 보인 반응이 걸작이다.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어 다행이야.”

만남은 숙명이기도 하지만 선별이기도 하다. 선생은 소유 가치에만 집착하는 왜소한 규격품들보다는 존재론적 가치에 눈뜬 초탈한 기인들을 가까이 해왔다. 기인들과 어울린 사연을 밝힌 시편이 더러 있는데, 대구 피난살이 중에 맺은 교분에 관한 시편 마지막 연만 옮겨본다.

하지만 그 질식할 시간 속에서
저들과의 시간만이 나의 숨통이요,
또한 유일의 자양이었다.
(<모과 옹두리에도 사연이> ‘시편 40’)

바야흐로 선생의 교분은 지구촌으로 확대되고 있다. 1986년에 선생의 시선집이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다(Ku Sang, Terre brùlée. Recueil de poémes, traduits par Roger Leverrier, Ed. Thesaurus, 1986). 1982년도에는 프랑스 펜클럽 회장으로서, 89년도에는 세계 펜클럽 회장으로서, 두 차례 내한한 바 있는 르네 따베르니에(Renè Tavernier)가 그 서문을 썼는데, 초월의 시인 구상을 칭송하면서 밝힌 따베르니에 자신의 시론(詩論)이 매우 인상 깊다. 형형색색 잡다한 시인들에게도 은밀하고 신비스런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은 영감이라고도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염원이라 하겠다. 일상을 초월하고 넘어서려는 염원이다. 거룩하다시피 한 순간에 이르러서야 발언하겠다는 염원이요, 거의 침묵에 가까운 발언을 하겠다는 염원이다. 그 침묵 가운데서 태어나는 말이야말로 시인의 정신과 마음 밑바탕에서부터 화살처럼 날아간다.”

1989년에는 서강대 영문과 교수 앤소니 수사가 선생의 시편들을 영역해서 영국에서 발간했다(Wastelands of Fire. Selected Poems of Ku Sang, translated from the Korean by Anthony Teague, London & Boston: Forest Books, 1989). 역자 앤소니 수사의 통찰 두 가지만 옮겨본다.

“시인은 하느님이란 낱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하느님은 그의 작품에 깊숙이 현존하신다. …… 설교조로 규탄해야만 예언자적 외침이 된다고 착각하는 수가 더러 있는데, 구상은 그런 잘못을 거의 또는 전혀 저지르지 않는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관찰이다. 마치 영원자를 상면한 양 수다 떠는 신앙시, 그 얼마나 역겨운가! 내 편 네 편 갈라놓고 비분강개하는 이념시, 그 얼마나 삭막한가!

이제 나도 말을 거두어야겠다. 도를 닦으면 닦을수록 마귀가 설친다[道高魔盛]는 격언을 선생은 입에 담곤 하신다. 어디 수도뿐이랴. 명성도 높으면 마귀의 유혹이 무성할 것이다. 이제 선생의 명성이 온 누리에 울려 퍼지기에 이르렀으니, 바야흐로 국제 마귀떼들과 일대 심전(心戰)을 치르지 않을 수 없으리로다. 삼가 빛나는 승리를 빈다. 선생의 앞날에 축복 있으라.

이 글은 정양모 신부가 1990년에 쓴 글이며, 구상 선생은 2004년에 선종했다. -편집자

정양모 신부

   
193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1960년부터 1970년까지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에서 유학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1970년부터 2002년까지 광주 가톨릭대학교, 서강대학교, 성공회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지냈다. 2005년부터는 다석학회 회장을 맡아 다석사상을 널리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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