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에 대한 사도 바오로의 '갈팡질팡' 시각

[정양모 신부의 복음과 세상 이야기]

2012-06-28     정양모

사도 바오로의 친서를 살펴보면 그가 지녔던 이중적 여성관을 알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임을 의식하고 말할 때는 남녀평등 사상을 피력하지만, 헬라 유다인 기질이 발동해서 말할 때는 남존여비 사상을 드러낸다. 우선 남녀평등 사상에 대한 대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남성도 없고 여성도 없다”

사도 바오로는 제2차 전도 여행 중 갈라티아 지방의 여러 교회를 방문한 다음, 에페소에 당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갈라티아 교회들로부터 불길한 소식을 들었다. 곧, 예수만 믿어서는 구원 받을 수 없고 유다교까지 믿어야만 구원 받는다는 이설을 퍼뜨리는 자들이 갈라티아 교우들을 선동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뜻밖의 사태를 수습하고자 바오로는 갈라티아서를 써보냈다. 그는 “어떠한 사람도 율법의 행업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써 의롭게 된다”(갈라 2,16)는 명제를 내세운 다음, 갈라티아서 3-4장에서 그 명제의 타당성을 논증했다. 이 문맥에서, 사도 바오로는 세례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인종 · 신분 · 남녀의 차별이란 있을 수 없다는 그 유명한 선언을 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들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누구나 그리스도를 (옷처럼)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유다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으며, 노예도 없고 자유인도 없으며, 남성도 없고 여성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 3,26-28)

▲ 에페소에서 전도하는 사도 바오로 ⓒEustache Le Sueur(1649)

위의 선언은 아래 두 가지 논거로 세례식 때 주례가 훈계하는 내용을 옮겨 적은 것으로 보인다. 첫째, 28절에서 “유다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습니다”만 3-4장 논지에 어울리고 “노예도 없고 자유인도 없으며, 남성도 없고 여성도 없습니다”는 문맥상 불필요한 내용이다. 표현에 있어서도 남녀 문제를 다룰 양이면 점잖게 남자와 여자(aner kai gyne)의 차별이 없다고 말하는 게 정상인데, 굳이 남성과 여성(aner kai thely=수컷과 암컷)의 차별이 없다고 강변한다.

이는 70인역 창세기 1장 27절을 연상시킨다. “하느님은 사람을 만드셨다. 하느님은 하느님 모습대로 사람(단수!)을 만드셨다. 하느님은 그들을 남성과 여성(arsen kai thely)으로 만드셨다.” 유다교 일각에서는 이 구절을 풀이하여, 하느님께서는 본디 양성 소유자 하나를 만드시고, 나중에 가서야 남녀로 구분하셨다고 한다. 유다교의 이런 주석을 참고하여 갈라티아서 3장 28절을 이해한다면,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인연을 맺은 그리스도인은 남성과 여성이 구별되기 이전의 한 사람처럼 된다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조물”(kaine ktisis: 갈라 6,15; 2코린 5,17)이 된다는 뜻이다.

미국 신약학자 웨인 믹스(Wayne A. Meeks)가 처음으로 명백히 이런 이해을 시도했고, 그 뒤 일부 주석가들이 동조하고 있다(Betz, Briggs; 아라이 사시구는 반대 견해). 갈라티아서 3장 26-28절에 양성 소유자 사상이 들어 있다고 단언할 수 없지만, 세례 훈화 전승이 들어 있을 가능성은 크다.

둘째, 갈라티아서 3장 26-28절의 내용과 전혀 다른 글귀가 코린토 1서 12장 12-13절에 실려 있다. 역시 세례와 관련되는 내용이다.

“몸은 하나이지만 여러 지체를 갖고 있고 그 몸의 지체는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의 몸)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한 영 안에서 한 몸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유다인이든 헬라인이든,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영을 마셨기 때문입니다.”(1코린 12,12-13)

갈라티아서 3장 26-28절과 코린토 1서 12장 12-13절이 모두 세례와 연관되는 점으로 미루어 이것들은 세례 훈화라 여겨진다. 비슷한 내용의 글이 콜로새서 3장 9-11절에도 나오는데, 이 역시 세례 훈화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갈라티아서 3장 26-28절이 세례 훈화 인용문이라면, 인종 · 신분 · 남녀 차별 철폐를 부르짖는 그 내용은 바오로의 지론일 뿐만 아니라 당시 온 교회의 신념이었다고 하겠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유다교 · 그리스 및 로마 사회와 비교할 때 일체의 차별을 넘어선, 또는 적어도 넘어서려고 작심한 대조 공동체 · 대안 공동체 · 대척 공동체였다고 하겠다.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바오로는 헬라 유다인 기질을 유감없이 드러내어 남존여비 사상을 피력한 단락(1코린 11,2-16)에서조차 여교우들이 교회 모임에서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을 당연시하였고(5절), 남녀는 평등하다고 말했다(11-12절).

“그러나 주님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가 있을 수 없고 여자 없이 남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생겨난 것과 같이 남자도 여자를 통하여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생겨납니다.”(1코린 11,11-12)

바오로 주변에는 여자 전도사 또는 부부 전도사가 자주 등장한다. 바오로는 필립비의 여교우인 유오디아와 신디케를 두고 “복음을 위해서 나와 함께 투쟁했습니다”라고 했다(필립 4,2-3). 또한, 켄크레아 교회의 봉사자 페베를 매우 존경했다(로마 16,1). 자기와 함께 에페소에서 옥살이를 한 다음 로마로 가서 전도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친척 부부를 일컬어 “사도들 가운데서도 출중하다”고 격찬했다(로마 16,7). 아퀼라와 브리스카(=브리스킬라) 부부는 코린토 · 에페소 · 로마에서 바오로의 전도를 도왔다(사도 18,2.18.26; 1코린 16,19; 로마 16,3-5). 바오로는 로마서를 끝맺는 인사에서 “여러분을 위해 수고를 많이 한 마리아에게”(16,6), “주님 안의 일꾼들인 드리패나와 드리포사에게 … 주님 안에서 수고를 많이 한 사랑하는 베로시스에게”(16,12) 자상하고 각별하게 문안한다.

“여교우들은 교회 모임 때 머리를 가리우라”

사도 바오로는 남녀평등 사상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남존여비 사상에 대해서 피력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오로 시대의 이스라엘 여자들은 외출할 때 너울로 머리를 가리웠다. 머리를 기리지 않고 외출하는 것은 이혼 사유가 된다. 이 경우에는 혼인 계약서에 명시된 보상금과 지참금도 되돌려 받을 수 없었다(미슈나 크투보트 7,8). 유다계 그리스도교, 이방계 그리스도교 가릴 것 없이 여교우들은 교회 모임 때 이 관례를 따랐다(1코린 11,16). 마치 요즘 우리나라 여교우들이 미사보를 쓰고 미사에 참석하는 것처럼.

▲ 미사보를 쓰고 미사에 참석한 여성 신자들 ⓒ김용길 기자

그런데 고린토 교회 여교우들 가운데 머리를 가리우지 않고 교회 모임에서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여자들이 더러 있었다. 사도 바오로는 맨머리로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코린토 여교우들을 못마땅하게 여겨 코린토 1서 11장 2-16절에서 여러 논거들을 댄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느님이십니다”(3절).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으려거든 아예 머리를 자르시오.”(6절) “남자는 하느님의 모습이요 영광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입니다.”(7절=창세 1,26-27) “남자가 여자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생겨났습니다.”(8절=창세 2,22) “또한 남자가 여자 때문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 때문에 생겨났습니다.”(9절=창세 2,18) “여자는 머리 위에 (남편의) 권위를 받들고 지내야 합니다. 천사들(이 유혹할지도 모르기: 창세 6,2) 때문입니다.”(10절) “자연도 여러분에게 가르쳐주지 않습니까? 남자가 긴 머리를 하고 다닌다면 그에게 불명예가 되지만 여자가 긴 머리를 하고 다닌다면 그에게 영광이 됩니다. 여자에게는 너울대신 긴 머리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혹시 누가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풍습이 없으며 하느님의 교회들에도 없습니다.”(14-16절)

사도 바오로는 여자들에게 머리 수건을 씌우려고 창세기(7-10절), 자연(14-15절), 교회 풍습(16절) 등을 예로 들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설득력이 약하다. 남존여비 텍스트(1코린 11,2-10.13-16)는 남녀동등 텍스트(갈라 3,26-28; 1코린 11,11-12)와 상치된다.

사도 바오로의 상치되는 여성관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으나 시원한 해명은 아직도 없는 형편이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남녀평등을 부르짖었으나, 헬라 유다인 기질이 발동하면 남존여비 사상을 피력했으리라. 여자가 교회 모임에서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은 좋다. 그렇지만 들떠서 머리 수건을 벗어던지고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보이는 것은 볼썽사납다는 것이리라. 원론은 남녀평등이고 각론은 남존여비라면 원론과 각론의 괴리라 하겠다. 다시 말해, 신앙 원칙과 사회 현실 사이의 괴리라 하겠다.

이슬람은 예나 이제나 여자들에게 너울을 쓰도록 강요한다.

“무함마드는 여성의 순결을 조개 속의 진주에 비유했다. 조개 속에 불순물이 들어가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베일이라는 보호막이 필요하다는 것이 꾸란의 내용이다. 여성의 순결이 조개 속의 진주처럼 맑기 위해서는 눈의 시선을 아래로 하여 다른 남자의 눈과 마주치지 아니하고 눈짓도 하지 않는 것이라 하겠다(꾸란 24:34).” (최영길, <꾸란의 이해>, 성천문화재단, 1995, 130쪽)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코린토 1서 14장 33ㄴ-35절에서 바오로는 부인들한테 교회 모임 때 물어보거나 배우고 싶은 것이 있어도 침묵하라고 명한다.

"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 다 그렇듯이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발언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율법도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오히려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무엇인가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서 제 남편에게 물어야 합니다. 여자가 교회에서 발언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14,33ㄴ-35)

여자들은 공석에서 발언하지 말라는 이 금령은 여자들에게는 너무나 치욕적이어서, 설마 바오로가 그런 말을 했을까, 남존여비 사상에 사로잡힌 어느 후학이 조작해서 코린토 1서에다 삽입한 말이겠지, 하는 학설이 심심찮게 제기된다(게르하르트 로핑크 지음, 정한교 옮김,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분도출판사, 1985, 158쪽; H.Conzelmann, Der ersterief an die Korinther, Gotingen 1969, pp.289-290; G.D.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Grand Rapids, 1987, p.705).

그러나 이런 학설은 아무래도 궁여지책이고, 바오로가 헬라 유다인 기질로 그런 말을 했다고 보는 게 상책일 듯싶다. 그 뜻은 여교우들이 교회 모임에서 머리를 가리운 채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까지는 허용되지만(11,5), 질문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14,33ㄴ-35). 성찬 모임 때 영언(靈言) 또는 예언(豫言)을 질서 있게 해야 하듯이(14,26-33ㄱ) 논의도 질서 있게 해야 하는 법인데, 그러자면 여자들은 빠지고 남자들끼리만 의논해야 한다는 뜻이겠다(14,33ㄴ-36).

이제 사도 바오로의 여성관을 집약하면, 그리스도인의 견지에서는 남녀평등을, 헬라 유다인의 견해에서는 남존여비 사상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여성관을 뚜렷이 정립하지 못하고 사정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했다.

그러니 바오로는 예수에 훨씬 못 미친다. 용수가 석가보다 못하고 맹자가 공자보다 못하며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보다 못한 것처럼 말이다.

정양모 신부

   
193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1960년부터 1970년까지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에서 유학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1970년부터 2002년까지 광주 가톨릭대학교, 서강대학교, 성공회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지냈다. 2005년부터는 다석학회 회장을 맡아 다석사상을 널리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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