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모습

[정양모 신부의 복음과 세상 이야기]

2012-04-13     정양모

무형무상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는 모습이 없으시다. 그는 세상의 어떤 모습과도 닮지 않은 무형무상의 신이시다. 이스라엘의 경전인 구약성서에서는 야훼의 형상화를 금했고 그 영향이 이슬람에까지 미쳐, 두 종교문화권에서 조형예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이슬람에서는 조형예술 대신 아라베스크 문양이 고도로 발달했다. 야훼께서 당신의 형상화를 금지한 말씀들은 다음과 같다.

탈출기 33,18-23 :“모세가 ‘당신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자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나서도 사는 사람은 없다.’ 야훼께서 이르셨다. ‘여기 내 옆에 있는 바위 위에 서 있으라. 내 존엄한 모습이 지나갈 때, 너를 이 바위굴에 집어넣고 내가 다 지나가기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가리리라. 내가 손바닥을 떼면, 내 얼굴은 보지 못하겠지만 내 뒷모습만은 볼 수 있으리라.’”

신명기 4,12-18 : 모세는 요르단 강 동편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야훼께서는 불길 속에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말씀하시는 소리만 들었지 아무런 모습도 보지 못했다. 다만 소리가 있을 뿐이었다··· 야훼께서 호렙의 불길 속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 너희는 아무 모습도 보지 못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희는 남자의 모습이든 여자의 모습이든 일체 어떤 모습을 본따 새긴 우상을 모시어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땅 위에 있는 짐승의 모습이나 공중에서 날개 치는 어떤 새의 모습이나 땅 위를 기어다니는 어떤 동물의 모습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물고기의 모습도 안 된다.” 

예수님의 모습

하느님은 초월적인 분이시라 형상이 없으시지만 살과 피를 받아 이승에서 사신 예수님은 일정한 모습을 지니셨다. 그러나 님의 모습을 포착해서 그림으로 그린 화공도 돌에 새긴 석공도 없었으니 님의 참모습은 영영 찾을 길이 없다. 다행스럽게도 님의 언행을 담은 복음서 네 편이 전해온다. 신심을 갖고 복음서에 들어 있는 님의 말씀과 행적을 묵상하다 보면 님의 심상이 떠오를 것이다. 이 심상을 포착해서 조형예술로 표현할 수 있겠다. 따사로운 신심이 없으면 님의 심상이 떠오르지 않고, 그 심상이 떠오르지 않으면 아무리 기교가 있다 한들 작품을 만들 도리가 없겠다. 네덜란드 출신 목사 루디 퀴켄(Rudy Kuyken) 의 일본 전도 체험담이 이를 뒷받침한다.

“일본 북부에 위치한, 산이 높고 원시림이 우거진 북해도 동부 지방에 아한호(阿寒湖)가 있습니다. 많은 훌륭한 아이누와 일본인 목공예가들이 호수 가장자리에 자리한 자그마한 마을에서 공예일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선교사 중 몇 명은 목공예가들과 그들의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1969년 여름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바빠 보였으므로 우리는 자진하여 그들의 작업장에서 조수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나는 일본인 목공예가인 장인 다다오 니시야마 씨의 작업장에서 마루를 쓸고, 우체국에 상자를 실어 날랐습니다. 나는 그의 작업에 감동을 받고 얼마 후 그에게 그리스도의 두상을 새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그러마고 승낙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 후 그리스도의 그림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더니 한 두 달이 지나서 그는 내게 끌을 내밀며 ‘당신이 그리스도의 머리를 조각하십시오. 내 마음에는 그의 상이 없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송천성, “기독교신학 : 아시아적 재건을 향하여” <기독교 사상> 1994년 12월호 77쪽)

▲ “Ecce Homo” by Georges Rouault, 1939-42
미술과 신앙이 이혼하다시피 한 20세기에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 1817 - 1958)는 거의 외톨이로 한평생 예수님의 모습을 부지런히 그렸다. 루오의 예수님은 인간의 고뇌와 고통을 속속들이 겪었기에 서럽고 부드러운 그 큰 눈으로 그윽이 중생을 바라보는 선하디 선한 모습이다. 루오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을 체득한 예수님의 자애로운 모습을 더없이 잘 표현한 것 같다. 그러나 루오가 유대교 지도자들의 비리를 가차 없이 질타한 예수님의 예리하고 당당한 모습은 놓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어진 면과 날카로운 면을 한 화폭에 담기는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조형예술로 예수님을 형상화하는 작업은 예나 이제나 매우 풀기 어려운 숙제다.

미술보다는 글줄로 예수님을 표현하는 일은 덜 어려울지 모르나 이 역시 결코 만만치가 않다. 내가 들은 일화 한 토막이 이를 뒷받침한다.

광복 이래 성북동 오두막에서 고고하게 사시는, 우리 시대의 마지막 선비 일창 유치옹(一濸 兪致雍) 선생께서 1990년 6월 3일 한정식 전문음식점 미진(味眞)에서 하신 말씀인데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시자 죽마지우 위당이 아버님의 행장을 짓겠다고 자청했어. 서너 해쯤 지나서 행장을 써 왔는데 도무지 내 아버님 이야기가 아니고 남의 아버지 이야기 같아, 느낀 대로 말했더니, 위당이 여느 때 같았으면 글발을 찢어버렸을 터인데 그러지는 않고, 반 시간 가까이 묵묵부답 속으로 분을 삭이고 나서 하는 말인즉 ‘평생 글 공부 한 내가 친구 부친 행장 하나 못 쓴대서야 말이 되는가. 다시 써주지.’ 하고 가버리더군.

또 서너 해쯤 지나서 새로 아버님의 행장을 써 왔는데, 아버님 그림은 못 되고 대충 윤곽만 그린 소묘 정도야, 아버님을 7할쯤 그렸더군, 그래 위당더러 ‘그만 됐수다, 이제 그만 이 일은 잊어버립시다.’ 했지 곧 이어서 6.25사변이 터졌는데 위당이 나더러, ‘춘부장 행장 잘 보관하고 있게나, 나중에 다시 손봐주겠네.’ 그랬는데, 그만 공산당원들에게 붙들려 가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어.”

복음서들을 숙독하면서 떠올린 예수님의 면모를 명제식으로 적어보겠다.

▶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서 사셨다.
▶ 예수께서는 평생 독신으로 사셨다.
▶ 예수께서는 목수· 석수· 건축기능공으로 대가족을 부양하셨다.
▶ 예수께서는 성경을 읽을 정도의 초보교육만 받으셨다.
▶ 예수께서는 서기 27년경에 출가하시어 거의 이스라엘 안에서 주로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신국운동을 펼치셨다. 이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아빠의 사랑에 감읍하여 경천애인의 삶을 살자는 운동이었다.
▶예수께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소외자들을 편애하셨다. 그는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로 통했다.
▶예수께서는 타고난 기가 남다른데다가 성령을 듬뿍 받아 영능(靈能)으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고치셨다.
▶예수께서는 율법주의를 단죄하고 인본주의적 율법관을 부르짖으셨다. 이 때문에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처치하기로 뜻을 모았다.
▶예수께서는 서기 27 -30년 사이 3년 남짓 활약하신 다음 ‘나자렛 사람 예수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예루살렘 북쪽 성 밖 골고타 형장에서 십자가형을 받아 약 36세로 요절하셨다.
▶그를 따르던 열두 제자는 스승이 붙잡혀 처형될 때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국사범으로 처형된 스승의 발현을 거듭 체험하면서 스승의 부활을 확신한 나머지 30년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여 그리스도교를 창교했다.

정양모 신부

   
193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1960년부터 1970년까지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에서 유학을 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1970년부터 2002년까지 광주 가톨릭대학교, 서강대학교, 성공회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지냈다. 2005년부터는 다석학회 회장을 맡아 다석사상을 널리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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