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은 햇볕을 찾아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
<신과 인간> 씨네토크, 성베네딕도 수도원 고진석 신부 초대
수사들의 최후 만찬 노래, 에디트 피아프의 <아니요,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3월 15일 영화사 백두대간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공동기획으로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린 영화 <신과 인간> 씨네토크에서 고진석 신부는 영화의 배경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수도승 전통과 국가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날 행사에는 안동교구 권혁주 주교와 의정부교구 이기헌 주교, 소설가 공지영 씨 등도 함께 영화를 감상했으며, 140여 석의 관람석을 가득 채운 가운데 진행되었다.
한상봉 편집국장(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진행으로 시작된 씨네토크에서 고진석 신부(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는 말문을 열면서 소설가 권정생이 “읽고나서 마음이 답답한 글이 좋은 글”이라고 했던 말을 인용하며 “영화를 보고나서 뭔지 찝찝하고 후련하지 않았다. 도망치면 될 텐데, 순교한 수사들이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래서 좋은 영화”라고 소개했다.
아틀라스에서는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고진석 신부에 따르면, 영화에서는 마치 성탄절 전날에 반군이 처음 수도원에 나타나고 겨울 끝에 7명의 수도자들이 잡혀가 순교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랜 시간에 걸친 것이라고 전했다. 1830년 알제리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독립한 뒤로 무장반군이 생겨났다. 여기서 의사로 나오는 루까(뤽) 수사는 1959년에도 반군에게 체포된 적이 있지만, 반군 가운데 루까 수사를 알아본 이가 있어서 풀려난 적이 있었다. 그는 루까 수사를 “가난한 이들의 벗이고, 마을사람의 벗”이라고 잡아온 동료에게 호통을 쳤던 것이다.
이슬람 반군의 외국인 테러는 1989년 10월 1일 이슬람구국전선이 ‘두 달 안에 모든 외국인은 알제리를 떠나라’고 포고령을 내리면서부터였다. 보복이 시작되면서 1993년 11월 1일에 4명의 외국인이 살해되었고, 영화에 나오는 살해당한 크로아티아 노동자들은 12월 4일에 죽었는데, 보스니아 내전에서 가톨릭인 크로아티아인들이 세르비아에서 이슬람교도들을 살해한 데 따른 보복이었다. 이들은 부활절과 성탄절마다 아틀라스 수도원에서 미사에 참석하던 이들이어서, 수사들은 이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1993년 12월 24일 무장반군이 수도원에 처음 찾아오면서 수도원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수도자들도 피난처로 모로코에 마련된 페스 수도원으로 떠나자고 결정했다. 교황대사와 추기경도 떠나라고 권했다. 그런데 그해에 연피정을 하면서 수도자들은 “왜 이 순간에 느끼는 삶의 기쁨을 포기하고 도망가야 하느냐”고 성찰했다. 이들 수도자들은 1996년 5월 21일에 죽었는데, 근 3년 동안에 걸쳐 심사숙고한 끝에 그들은 알제리에 남기로 결정했고, 순교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나는 전혀 후회하지 않아”
고진석 신부는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크리스티앙 원장신부와 루까 수사"라고 전했다. 크리스티앙은 원래부터 알제리를 떠날 생각이 없었고, 그가 미리 남긴 유언장에는 “우리는 이 땅과 하느님을 위해서 바쳐진 생명”이라고 전했다. 이 유언장은 2000년 대희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20세기의 순교자 명단>을 발표할 때 참고한 글이다. 크리스티앙은 알제리 태생으로, 군복무 중 만난 이슬람 친구가 자신을 대신해 살해당하는 것을 겪고 “이슬람인의 신앙이 얼마나 깊은지” 체험했다고 전했다.
이 체험이 그를 회개로 이끌어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교황청립 이슬람연구소에서 2년간 이슬람공부를 할 만큼 이슬람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입회 후에도 성당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이슬람 신자들은 사원에 들어갈 때 신을 벗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음력 9월이 되면 라마단 한 달 동안 크리스티앙도 이슬람 신도들처럼 단식했다. 자신들에게 배타적인 이웃에 대한 포용심과 자기를 버리고자하는 헌신의 의지가 그에게 있었다.
루까 수사는 처음 반군이 수도원에 난입했던 1994년을 지내고 다음 1월 1일에 팔순을 맞이했는데, 그날 만찬에서 챠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날 이들 수도자들이 식당에서 함께 들었던 음악은 에디트 피아프의 <아니요,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라는 노래였다. 이 공동체 구성원들은 이 노래를 다 듣고나서, “더 후회할 삶이 없는 데 왜 여기서 도망가야 하나”하며 회개했다. 루까 수사가 남긴 <영성일기>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약한 자를 대변해 주는 것이며, 아픈 자의 아픔을 같이 느끼는 것”이라고 적혀 있다.
아니요, 전혀 후회하지 않아요 아니요, 전혀요, 난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다 마찬가지예요,
아니요, 전혀요, 어떤 일도 난 후회하지 않아요,
대가를 치렀어요, 흘러간 일이예요, 잊혀진 걸요,
지난 일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아요, 내 추억에 대해서도요,
내 고통의 기억, 또 즐거움의 기억에 불을 놓았어요,
그 어느 것도 이젠 필요치 않으니까요,
내 사랑들을 흘러 보냈어요, 고통들도요,
모두 다 쓸어냈어요,
나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요,
아니요, 전혀요, 후회하지 않아요,
오늘 이후로 나의 인생, 행복, 모두 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니까.
누구와 어디에 남을 것인가?
고진석 신부는 수사들이 수도원을 떠날 것인지, 남을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주민과 나눈 대화를 상기시켰다. 수사들은 주민들에게 “우리 떠날지도 몰라요”하고 묻자 주민들은 “왜?”라고 묻는다. 이에 “새들은 가지를 떠날 때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고 전하지만, 주민 가운데 한 여인이 “우리가 새고, 너희가 가지”라고 말한다. 나무에 깃들어 사는 새는 종교는 다르지만, 수도원에 깃들어 사는 이슬람의 가난한 이웃들이었다. 고 신부는 덧붙여 “베네딕도 수도자들은 청빈, 정결, 순명 서원뿐 아니라 수도승답게 살고, 정주할 것을 서원한다"고 전했다. "이 자리 이 순간에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리고 살겠다는 서원"을 한다는 것이다. 이 순간에 아틀라스의 수도자들은 정주 서원에 담긴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깨닫고, 그래서 감히 보금자리 두고 떠날 수 없었다.
고진석 신부는 정주서원과 관련해 지난 2007년부터 2011년에 걸쳐 한국의 마산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수도원’이 수정만 일대의 STX 조선소 유치반대했던 투쟁을 사례로 들었다.
“가진 자들은 항상 꼼수를 부리는데, 지역 유지 몇 명만 섭외하고 전부가 찬성했다고 사업을 밀어붙인다. 가진 것 없는 주민들은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면 도시로 가서 빈민으로 전락한다. 시골에 살면 공동체가 있어 돈이 없어도 살수 있다. STX 측은 수도원 측에 몇 백억을 보상해준다고, 수녀원을 통째로 옮겨준다고 제안했다. 그때 비겁하게 도망가야 하나 여기 남아야 하나 고민했다. 수도원에서 로마총원에 문의한 결과 총장은 ‘남아라 거기서 그들과 같이 죽으라’는 회신을 보냈다.”
결국 트라피스트 수도원 수녀들은 지난 3년 내내 주민들과 더불어 길거리에 앉아 있었다. 마산시청으로, 마산교구청으로, STX본사로, 국회로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결과 지난 해 조선소 유치가 백지화되었다. 그래서 마을에 제사가 있으면 제삿떡이 수녀원까지 들어온다고 전했다. 수녀원이 주민과 하나가 된 것이다. 고진석 신부는 반군이 처음 수도원에 찾아온 게 성탄절 전날인데,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임마누엘 하느님이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아플때나 괴로울 때나 죽음에서도 함께 계시는 분이다. 싸구려 은총을 던져주는 하느님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고난 속에도 함계 계시는 하느님이 발견된다”고 말했다.
‘국가주의’라는 우상에 빠져있는 대한민국
이날 토크에서는 “누가 왜 수도자들을 죽였는지, 정부군인지 반군인지” 질문이 나왔다. 이에 고 신부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의 대결구도 안에서 양심있는 자들이 어떤 처신을 해야하는지”라고 하면서 “반군은 반군대로 정부군이 정부군대로 자신이 선이라면서 폭력을 행사한다. 여기서 수도자들은 양비론이 아니고 자기 중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했다. 고 신부는 파스칼의 <팡세>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악을 행할 때 가장 거침없이 기분 좋게 악을 행한다”는 말을 인용하며, 이분법적 사고가 폭력을 낳는다고 전했다.
“이분법적 사고가 우리 머릿속을 지배하는 한 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수사들은 수도원 안에서 기도나 해, 왜 나와서 정치 이야길 해.’ 하지만, 그게 아니다. 수도자들이 사회참여를 하는 것은 정치 때문이 아니라 아파하는 사람들을 대변해 주고 공감해 주는 것이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국방은 군인에게, 종교인은 도만 닦으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고진석 신부는 “그래서 수도자들은 무엇이 과연 하느님의 뜻인지 사탄의 장난인지 맘몬의 농간인지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고 전하면서 “그 지혜를 통해 수사들에게 불이익이 오더라도 그걸 선택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
한편 ‘순교’ 문제는 ‘국가주의’에 대한 이야기로 번져나갔다. 고진석 신부는 국가와 관련된 스캔들로 항상 입에 오르는 것이 ‘황사영 백서’ 사건이라면서 “황사영 백서의 ‘대박청래’ 큰 배를 청해서 조선을 공격하라는 문장이 논란거리가 되었는데, 그리스도교는 기본적으로 국가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정의와 평화가 꽃피는 하느님나라를 추구한다”고 전하며, 근대적 '국가주의'의 문제점을 들추었다.
고 신부는 “우리는 항상 ‘애국’을 말하며 ‘애국은 절대적 선’이라고 전하지만, 당시 조선이란 나라를 보면 애국하고 싶은 나라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조선은 세도정치와 국가폭력과 인습이 난무하는 나라였다. 이런 입장에서는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데, “신앙은 다만 순간에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교회 어른들은 ‘신앙인으로서 국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 분명히 일러주지 않았다며 “지금 우리나라 전체가 국가주의라는 우상에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국가가 시행하면 무조건 따라야 되고, 국가가 시행하면 무조건 선이라는 생각은 문제가 있다. 국가도 인간이 만든 조직이라, 당연히 실수할 수 있고, 판단착오를 내릴 수 있다. 예전에는 국가가 공동선을 위해 노력하는 제도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국가가 공동의 이익을 어떻게 더 많이 창출하느냐만 묻는다. 이에 따라 국민들이 열광한다. 수단이 좋든 나쁘든 국부가 늘어나야 좋은 나라라는 생각은 신앙인의 양심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런 미몽에서 빨리 깨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게 수도자들이며 종교인이다.”
이어 고 신부는 최근 발생한 4대강 사업과 강정 해군기지 문제, 동해안 핵발전소 건설 등 국책사업들을 지적하며, “우연찮게 왜관수도원 앞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경북 도지사는 핵클러스트를 만든다고 한다. 핵발전소를 27개나 짓는다고 하는데, 더 미치고 환장하게 만드는 것은 강정이 제 고향이기 때문”이라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고진석 신부는 이러한 국책사업에 대해 “조직이 만드는 제도적 폭력”이라고 비판했다.
국가폭력, 우리가 주권자의 이름으로 거부해야..
이어 “더 심각한 문제는 개인적으로는 다 양심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모아 놓으면 괴물로 변해 약자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소 세우는 곳에 가보면 다 60년대 풍경이다. 국가조직은 꼭 그런 약한 부분만 계속 건드린다”며 “이런 폭력을 이제는 주권자의 이름으로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 신부는 “국가도 민족도 신이 아니다. 항상 애국애족을 말하는데, 애국이란 말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가톨릭신자들마저 여기에 물들어 있다. 국가가 다른 나라 침략하고 다른 가서 깽판치고 그래도 박수쳐 줄 것이냐”고 물었다.
고 신부는 “남이 아프면 나도 아픈 것이기에, 권정생 선생은 ‘애국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 대포도 안 만들고, 함대도 안 만들고, 젊은이가 훈련소에 안 가고, 전쟁도 안 한다. 그 대신에 남을 더 사랑하고, 자연을 더 보고, 하늘을 더 보고, 그래서 진정 아름다운 나라가 된다”고 전했다. 이어 ‘평화’에 대한 이런 이야기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말한 것인데, “50년이 지나도록 신자들은 아직도 이걸 모르고 있다”면서, 소수라도 깨어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세상은 항상 소수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 이 소수가 깨어나면 세상이 깨어난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먼저 촛불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한다. 수도자들은 매일 이 질문을 던지며 ‘뭐하러 지금 여기에 와 있는지’ 묻는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와 <백두대간>이 마련한 두번째 <신과 인간 씨네토크>는 오는 총선 다음날인 4월 12일 오후 1시 같은 장소인 이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이연학 신부(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도원)를 초대해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갖는다.
또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는 각 교구의 본당에서 영화 <신과 인간> 공동체상영을 접수받고 있다. 현재 서울과 광주, 부산에서만 상영되는 이 영화를 신자들과 더불어 보고 싶은 본당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로 문의하면 된다.(문의: 070-8292-7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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