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생각해서 높이 살자!
[교회는 누구인가-김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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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이명박 정부가 종착점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다. 뻔뻔스러운 도적정치(kleptocracy)에 기색혼절한 민심은 하루하루 날수를 세면서 정권말기의 징후들을 조심스럽게 관찰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다. 대학등록금 문제로 모처럼 촛불이 켜졌으나 기세는 미미하다. 또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고공 농성을 응원하기 위하여 희망버스가 달려갔지만 컨테이너로 입구를 틀어막은 사측은 꿈쩍도 않는다. 두고 볼 일이지만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눈물이 마를 것 같지 않다. 과연 ‘2013년’에 우리가 바라는 새로운 체제를 맞이하게 될지 염려스럽다.
지난 3년의 끔찍한 파행과 추락에서 벗어나 제발 원칙과 상식의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현 집권세력에 대한 불만과 원망이 남북평화와 공생공락을 중시하는 복지체제에 대한 합의로 숙성되지 않는 한 의미 있는 성취는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퇴행적 행태를 심판하겠다고 잔뜩 벼르는 민심을 기득권 세력이 그냥 두고 볼 리 만무하다. 이미 특권적 지위를 고수하기 위한 영리한 움직임들이 개시되었다.
무한대의 재력과 법의 엄호를 받는 완력을 바탕으로 그리고 여론을 가공하고 조작하는 테크닉을 동원하여 펼치게 될 강자들의 총공세를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다. 우리가 이런 문제에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그 동안 신물 나게 겪었듯이 정치적 선택에 따라 사람은 물론이고 피조물들의 운명까지 달라지기 때문이다. 부디 지혜로운 판단으로 민주주의의 나무가 다시 무럭무럭 자라나 알찬 열매를 맺도록 기도할 뿐이나 그렇다고 순박한 민초들이 엉뚱한 선택을 내려놓고 번번이 땅을 치는 일을 방관할 수도 없다. “깊이 생각해서 높이 사는 길”이 무엇인지 또박또박 설득하고 꼼꼼히 알려주는 것은 교회의 당연한 봉사이기 때문이다.
새 길을 가는 사람들
그 옛날 사람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벌인 운동을 ‘길’이라고 불렀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는 분이라는 평을 받았다.(마태 22,16) 예수를 따라간 사람들은 “평화의 길”(루카 1,79)과 “진리의 길”(2베드 2,2)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라고 여겨졌다. 사울이 살기를 내뿜으며 다마스쿠스로 달려 간 것도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사도 9,2) 일망타진하기 위함이었다.
자, 시종일관 성경이 예수와 예수의 사람들을 ‘길을 찾은 사람’, 그래서 새롭게 ‘길을 간 사람들’로 부르고 있다는 점을 무심코 놓치지 말자. 그렇다. 종교는 길이다. 오리무중이라서 더듬거리거나 캄캄한 밤이라서 좌충우돌하는 사람들이 턱턱 마음 놓고 신나게 걸어갈 수 있는 길이라야 비로소 참 종교가 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팔레스타인에서 생겨난 예수 운동이 로마 제국의 드넓은 지중해 영역 그 너머로 퍼져가면서, 그리고 급기야 제국의 공식 종교로 승격되는 과정에서 탈색, 변색, 착색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길’이 사라지다시피 되었다. 우리라고 별 수 없었는지 종교의 일반적 행로를 고스란히 답습한 것이다.
“소수의 종교적 천재나 몇몇의 강한 종교 체험과 카리스마로 출발한 종교라도 신도 수가 증가하여 사회의 다수를 점할 정도로 성공하면, 사회를 변화시키는 대신 사회체제나 가치체계와 영합하여 한통속이 되어버립니다. 심지어 국교가 되어, 소수 집단이나 자유사상을 억압하면서 체제 수호의 도구로 전락합니다. 종교가 본연의 정신과 역할을 망각하고 사회체제와 문화체제 속으로 완전히 편입해버리는 것이지요.”(길희성)
뜻밖의 마중물, 사회교리
교회마저 속물주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마당인데 웬일인지 사회교리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교리와 신조만 애지중지하고 사회적 투신과 올바른 실천을 도외시하거나 불온하게 여겼던 그간의 퇴화현상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전 국민이 신자가 되면 뭐하겠습니까.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 한 명을 만드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몫이라 생각합니다. 교회는 주로 개인 윤리나 신앙실천 차원에서 가르쳐 왔어요. 사회적, 집단적 차원의 교회 가르침은 거의 백지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회교리는 지킬 교리인 십계명을 실제 어떻게 지키고 살아가야 하는지 풀이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사회문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인 사회교리를 배우고 이를 근거로 다양한 분야의 사회문제를 식별해나가야 합니다.”(강우일 주교. 2011년 1월 16일자 가톨릭신문)
하지만 이런 경향은 소수 지도자의 안목이거나 일부의 자각에 머물고 있다. 그렇더라도 불씨 혹은 마중물로 여기고 잘 다독거려 교회가 본래의 길로 돌아가는 일대 전기로 삼아야 한다.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는 사회교리서에 대해 “이 문서는 우리 시대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봉사 행위”라고 하면서 인간존재와 사회와 역사가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한 해답이 되기를 바랐다.(13항)
우리가 세상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마땅한 관심과 연대를 보일 때마다 이를 ‘친북좌파’의 ‘정치선동’이라고 우겨대는 가엾은 지적풍토를 생각해서라도 그리고 국가권력에 얻어맞고 자본권력에 짓눌려 기죽어 지내는 민심을 달래고 이끌 현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당장 사목자와 수도자들부터 사회교리라는 교회의 오랜 보화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하느님과 일하는 사람들”(2코린 6,1)의 우선적인 임무가 여기에 있다.
“그러하오니 소인에게 명석한 머리를 주시어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수 있고 흑백을 잘 가려 낼 수 있게 해 주십시오.”(1열왕 3.9)
김인국 / 신부, 청주교구 금천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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