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약이 되고 세상에 밥이 되는 언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광주평화방송 '교회, 바로보기' 인터뷰-한상봉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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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봄, 인터넷 언론사로 정식 창간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창간 1주년을 맞는다고요? 소감이 어떠신지요?
그러다 지난 해 3월 26일에 정식으로 언론사 등록을 하고 홈페이지를 운영해 왔는데, 그동안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이제야 겨우 체계를 갖추어 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재정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부족한 점이 많지만 ‘꼭 필요한 언론’이란 생각이 변함 없기 때문에 모든게 잘 되리라 믿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이라고 생각해요. 불확실함 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아도 투신하는 것 말입니다.
1주년 준비는 어떻게 잘 되고 있습니까?
작년 창간기념식을 할 때는 기념미사 없이 <녹색평론>을 펴내시는 김종철 선생의 강연을 듣고, 우리 사회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방법을 모색하면서 기념식을 열었는데, 이번엔 감사미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특별히 그동안 자리를 내주고, 산파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우리신학연구소에 감사를 드리고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꺼이 자원해서 취재하고 기사를 써주었던 기자들, 그리고 편집위원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결국 돈도 사람도 없이 시작한 언론을 이만큼 키워준 것은 ‘바람’이었다, 라고 할까요. 저희는 그걸 성령의 바람이라고 부르고 싶군요. 특히 작년에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의 죽음도 있었고, 용산참사라는 큰 사건도 있어서 정신없이 바쁜 시간이었는데, 그 모든 현장에서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에 정말 눈물 나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3월 26일 금요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저녁 6시30분부터 시작되는 창간1주년 기념미사에는 문화공연이 포함되어 있는데, 거창하게 하지 않고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함께 해온 분들의 목소리를 듣기로 했습니다. 이번 행사에선 올해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재익 군이 함께하는 청소년밴드 'asks'의 노래를 듣고, 저희 취재기자인 고동주 씨가 얼마 전까지 함께 했던 참여연대 노래패인 '참좋다'를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희 편집위원이면서 필자이기도 한 가수 김정식 로제리오 씨의 노래를 듣기로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참석해서 함께 기뻐해주셨으면 합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참 쉽지 않은 길이기도 했을 듯한데, 특히 교회의 관행에 문제를 제기 할 때 비판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이런 점들이 편집자로서 힘들지는 않았는지요?
저희는 공개적으로 대안언론을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평화신문이나 가톨릭신문과 차별성을 가지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교회 안에 비슷한 언론이 여러 개 있을 필요가 없잖아요. 우리가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입니다. 세상의 아픔을 내 것으로 끌어안고 어머니다운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 세상 안에서 교회가 예언자의 직분을 올바로 수행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공평과 정의,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사회 안에 실현되도록 돕는 게 ‘복음화’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향해 발언하지만, 세상이 하느님 뜻에 부합하는지 재는 척도를 세상뿐 아니라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해 보자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려면 교회 스스로도 정의로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 교회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모습에 태클을 거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본당에서 마주친 교회>라든가 <우리신학산책>과 같은 칼럼뿐 아니라 인천교구 영성센타 건립문제와 교회 내 친일 문제 등 교회적으로 예민한 사안을 다룰 수밖에 없었죠.
이 때문에 교회 내 일부 주교님이나 신부님들, 어느 때는 성직자들 보다 신자들이 먼저 “반교회적 언론” 운운하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어떤 신부님은 저희 언론이 주교회의의 인준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이름에서 ‘가톨릭’이란 말을 빼라고 주문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언론이 기존 교회에 비판적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반교회적’이라는 지적을 받지만, ‘반복음적’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우리가 말하는 것은 ‘교회가 복음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잣대에 비추어 교회 역시 쇄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어려움은 있지만, 복음적 충실성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는 자신감을 갖고 나아가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최종적으로 인준해 주실 분은 바로 그분, 하느님과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는 용산참사 당시 어떤 언론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지속적으로 관련 기사를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어느 정도는 해결 되고 결론이 났는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더 많은 독자들에게 알려진 계기도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어떻습니까?
아시다시피 저희 언론은 정치권의 이야기 등은 기사로 잘 다루지 않습니다. 물론 칼럼 등을 통해 정치적 사안을 다루기도 하지만, 저희가 주로 취재기사로 다루는 것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던 벽두에 나자렛 회당에서 구태여 이사야서를 찾아 읽으신 뜻을 따르는 것이지요.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먼저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돌보고 관심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용산참사 역시 ‘우리시대의 가난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기에 저희가 매달렸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가난한 이들은 그들처럼 철거민이거나, 여성이거나, 아이들입니다. 성소수자이거나, 이주노동자거나, 비정규직 노동자거나 농민들입니다. 최근에 <가난이 살려낸 것들>이라는 칼럼이 새로 연재되기 시작했는데, ‘가난’은 넘어서야 할 사회적 악이면서, 동시에 ‘평등한 가난’이라는 말이 가르치듯이 ‘신실한 사람들의 훈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참상을 고발하고, 동시에 그들 안에서 희망을 찾아나가려고 합니다.
용산참사에 대한 보도 때문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더 많이 알려진 계기가 되지 않았느냐고 하셨는데, 주님께서는 고난 속에서 오히려 길을 열어주신다는 뜻으로 알아듣고, 더 열심히 일하려고 합니다.
이외에도 편집국장님 개인적으로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은 글과 기사가 있다면...?
글쎄요.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어요. “애도할 줄 모르는 한국천주교회를 곡(哭)함”입니다. 당시 온 국민들이 애도의 마음을 표하고, 불교와 개신교에선 공식적으로 반응했는데, 유독 한국 천주교회의 반응만 냉담했습니다. 비록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였지요.
이때 천주교회의 공식반응은 정진석 추기경이 "노 전 대통령의 불의의 서거 소식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며 "갑작스러운 서거 소식으로 큰 슬픔과 충격에 빠져 있는 유족과 국민들에게도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는 짤막한 멘트 뿐입니다. 그때 너무 답답했죠. 명동성당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현수막 하나 걸려 있지 않았고, 주교회의 차원이나 서울대교구 차원에서 공식적인 추도미사를 열겠다는 발표도 없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70년대에 민주화 과정에서 박정의 대통령과 그렇게 많이 갈등을 빚었는데도 박 대통령이 서거하자 명동성당에서 추도미사를 봉헌해 주었습니다. 죽은 자에 대한 종교인다운 예우였지요.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만 못하다는 것인지 속상했던 거지요.
그 당시 명동성당에 빈소가 차려지지 않아, 저 같은 경우에도 조계사 분향소에 가서 조문을 드렸습니다. 국민들과 더불어 호흡하지 않는 종교란 무엇인지 깊은 절망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애도할 줄 모르는 한국천주교회를 곡(哭)함”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때 저는 한국교회가 이미 ‘슬픔의 능력’을 잃어버린게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용산참사 때에도 정진석 추기경과 대부분 주교님들은 용산에 와보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강우일 주교님과 김운회, 최기산 주교님 등이 유족들을 만나 위로해주었다는 점에서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했지요. 지금 슬퍼하는 자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 교회는 교회로서 본분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사람들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보며 그렇게 슬프게 울었다지만, 정작 눈앞에서 억울하게 죽어가는 이들의 고통에는 눈을 감습니다. 그런 점을 꼬집고 자극해서 교회가 예수님의 연민 가득한 마음을 회복하도록 돕는 것 역시 교회언론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들리는 얘기로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기사를 빠짐없이 보는 애독자들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1년 사이 독자들은 많이 늘었습니까?
집계를 보면 하루 평균 700-800명 정도의 독자들이 사이트에 방문합니다. 언론사로서는 아주 적은 숫자입니다.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한 분들은 1천여 명 정도 되는데, 이분들께는 매주 한번씩 웹메일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언론사로서 그렇게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든 교회와 세상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민을 느끼는 분이 있다면 발언하고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있다는 것이지요.
저희가 ‘교회에 약이 되고 세상에 밥이 되는 언론’이라고 했는데, 교회에는 간혹 쓴 약이다보니, 많은 분들이 복용하길 어려워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도 특효가 있는 약이라면 필요한 분들은 언제든 찾아서 드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몸에 병이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거나, 몸 자체에 관심이 별로 없는 이들에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그저 그림자 같은 것이겠지요.
그런데 정작 병통(病痛)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약을 찾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저희가 홍보를 많이 해야 하는데, 방법이 많지 않더군요. 시간도 돈도 별로 없고요. 교회에서도 그렇게 달가와 하지 않아서 홍보를 부탁하기도 쉽지 않아요. 누군들 싫은 소리 하는 걸 좋아하겠습니까? 그걸 인정하고 가능한 방법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평화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에 저희를 출연시켜 주시는 것도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1주년 미사에 독자들을 초대하면서 한 돌을 맞아 "이제 겨우 발을 땅에 딛고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라고 했는데... 앞으로 지금여기가 나아갈 방향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요?
그동안 한 해 동안 언론활동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 신자들이 ‘사회교리’에 대해 너무나 모른다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뭔지, 본당만 벗어나면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해요. 그러니 ‘신앙 따로 생활 따로’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기초부터 공유하는 작업을 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해에는 용산참사가 워낙 큰 사건이라서 거기에 집중한 면이 많았고, ‘가난’의 문제가 부각되었는데, 올해에는 우리의 관심을 생태계의 차원으로 넓히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올해는 4대강 개발 문제가 크게 불거져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데, 단순히 4대강 문제에 머무는 게 아니라 환경생태 문제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묻고, 우리가 생활 속에서 피조물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루카복음에 따르면, 예수님도 짐승의 밥통인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분은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지만, 또한 짐승들의 먹이가 되러 오시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뿐 아니라 가난한 피조물의 상황을 짚어보려고 합니다.
소수자, 여성, 가난한 이들의 현실에 주목하려 애쓰는 언론으로서 앞으로 더욱 자리매김 하기를 바랍니다. 창간 1주년 행사 잘 준비하시구요.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